1998년 4월 17일.
서울 세종로 정보통신부 청사 주변은 경호가 삼엄했다.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은 전날부터 정통부 입구에 검색대를 설치하고 동선을 확보하는 등 치밀한 경호작전을 세웠다. 일반인의 정통부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미리 등록해 비표를 받은 사람만 출입을 허용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취임 후 처음 정보통신부를 방문했다. 배순훈 정통부 장관으로부터 새해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서였다.
오전 10시.
김 대통령이 배순훈 장관 안내로 정통부 14층 대회의실에 들어섰다.
이날 대통령 업무보고는 방식이 과거와 판이했다. 예전 일방통행식 업무보고가 양방향 토론식으로 바뀐 것이다.
김 대통령은 3월 초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문화부 장관·청와대 비서실장 역임, 현 민주통합당 의원)을 통해 “새해 업무보고는 대통령이 해당 부처로 가서 20분 업무보고, 20분 토론, 대통령 지시 20분으로 진행할 것”이라며 “업무보고 내용은 폐쇄회로TV로 공무원들이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예고했다.
그동안 대통령 업무보고는 각본에 따라 진행했다. 해당 부처 장관이 업무보고를 하면 대통령이 몇 가지 현안을 장관에게 질문한 후 대통령 말씀 순으로 막을 내렸다.
대통령 지시사항은 해당 부처와 사전 조율해 자료를 만들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이런 자료를 만들지 않았다.
업무보고 방식이 토론식으로 바뀌자 부처 실·국장급 간부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김 대통령과 첫 만남인데다 어떤 내용을 질문할지 알 수 없어 간부들의 긴장도는 현저히 높았다.
김 대통령은 일에 관해 논리적이고 치밀했다. 김 대통령은 부처 방문 전 청와대 수석과 관련 비서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이들과 토론을 했다.
김 대통령은 결과를 종합해 토론할 내용과 질문사항을 국정노트에 꼼꼼히 기록했다. 말씀자료는 국정노트가 대신했다. 국정노트에 무엇을 기록했는지는 김 대통령만 알았다.
정통부 업무보고에는 김종필 국무총리서리(국무총리 역임), 김중권 비서실장(현 변호사)과 김태동 경제수석(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국민회의와 자민련 정책위 의장 등이 배석했다.
이날 정통부 업무보고는 배 장관의 정홍식 차관(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이사장) 등 간부 소개, 업무보고, 대통령과 토론, 대통령 말씀 순으로 1시간여 계속했다.
좌석 배치는 김 대통령이 전면 중앙에 혼자 앉고 왼쪽 줄에 배 장관과 정 차관, 김동선 기획관리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등 정통부 간부들이, 오른쪽 줄에는 김 총리서리와 청와대 비서실장과 국민회의와 자민련 정책위 의장이 앉았다.
김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통부가 지식정보화 사회에 대비해 모든 국민이 컴퓨터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교육시설을 확대해 달라”면서 “고부가가치 산업인 소프트웨어(SW) 산업 진흥책을 마련하고 우정사업 민영화를 추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 대통령은 또 “21세기는 정보통신 산업이 국가 운명을 좌우하므로 정통부가 경제위기 극복에 견인차 역할을 해주고 현재 22위인 정보화 수준을 5년 안에 10위권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강조했다.
배순훈 장관은 업무보고에서 주요 정책과제로 △지식정보사회를 향한 정보화 △정보통신 핵심 기술 개발 △전파방송산업 활성화 △우정사업 경영 효율화 △경제난 극복 지원 대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배 장관은 이를 위해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현재 유선 10%, 무선 33%인 지분한도를 폐지하고, 유무선 33%인 외국인 지분한도를 49%로 확대하며, 외국인 취득한도가 20%인 한국통신(현 KT) 지분도 해외주식예탁증서(DR) 발행 후 늘리겠다”고 말했다.
배 장관은 “2002년까지 정보통신 부문에서 44만명의 신규 일자리를 만들고 벤처기업 창업 지원을 확대하며, 중소 SW 및 벤처기업이 대학졸업자를 인턴사원으로 채용하면 훈련비도 지원하겠다”면서 “2002년까지 세계 10위 정보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총 32조원을 들여 2010년까지 초고속정보통신망을 구축하고 국민 1인 1PC 보급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배 장관은 이어 “각급 학교에 전산교사를 배치하고 산학연 공동으로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을 개발하겠다”면서 “지상파TV의 디지털화를 추진하고 우정사업 경영체제를 기업형으로 바꾸겠다”고 덧붙였다.
배 장관은 김 대통령에게 △정보화전략회의 정례화 △부처별 정보화책임자(CIO)제 시행 △정보화예산 사전조정제도 도입을 건의했다.
김 대통령은 배 장관의 업무보고가 끝나자 정통부 관계자들과 토론회를 진행했다.
◇김 대통령=우리 정보화 수준은 어느 정도며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배 장관=IDC 조사결과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정보화 수준은 세계 22위권입니다. 컴퓨터 보급은 확대됐으나 SW 사용률이나 컴퓨터 간 네트워킹(연결성)은 부족합니다. 국민 컴퓨터 활용도 등을 높여 앞으로 5년 안에 정보화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 대통령=국민의 컴퓨터 이용 확산을 위해 구청, 동사무소에서 컴퓨터를 배울 수 있도록 시설 및 교육기회를 확대해야 합니다. 정통부가 지도해 컴퓨터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교육기회를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배 장관=현재 전국의 우체국 3500개소, 위탁경영 우체국 700개 등 4200개의 여유공간을 활용, 컴퓨터방을 설치, 운영 중입니다. 이런 컴퓨터 교육을 동사무소나 구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겠습니다. 또 2002년 컴퓨터가 입시과목에 들어갈 예정이므로 올해 교사 양성과 컴퓨터 설치사업을 추진해야 합니다. 교육부와 협조해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김 대통령=미국의 정보통신산업은 SW와 하드웨어(HW) 분야 비율이 9 대 1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반대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만큼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가 낙후된 셈인데 현 상황은 어느 정도며 SW 육성 방안은 무엇인가요.
◇배 장관=우리나라의 SW 불법 복제 이용률이 90%에 이르는 등 SW 활용도가 낮은 편입니다. 현재 HW와 SW 비중은 HW가 약 75∼80%, SW가 15∼20%입니다. 정부부처 예산에 매년 15%를 배정, SW를 구매하도록 권고 중입니다. 앞으로도 SW 부문에 지원을 확대하고 활용을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김 대통령=그간 우리 정보통신 분야는 반도체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어요. 반도체 외에 새로운 전략사업 분야를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안병엽 정보통신정책실장=반도체가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하는 등 수출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현재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단말기 분야가 유망합니다. CDMA 단말기는 지난해 2억달러를 수출했고 올해 수출액은 12억달러에 이를 전망입니다. 이와 함께 CRT 평면유리, 디지털TV 기술 등 전략품목 10개를 선정, 중점 육성하겠습니다.
◇김 대통령=정부에 바라는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석호익 정보기반심의관=대형 국책사업 추진 시 정보화계획을 반영하도록 의무화하게 해주십시오. 현재 항만, 지하철 건설 등 총사업비 1000억원 이상 사업 96개를 진행 중입니다. 이 같은 국책사업은 현재 시설 확충이나 현대화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에서 볼 수 있듯이 정보화계획을 반영, 투자하면 기존 시설의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물류비 절감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서영길 우정국장=우편 서비스는 국민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서비스입니다. 서비스 개선을 위해 기업 운영 기법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른 시일 내에 우정사업 운영에 관한 특례법을 개정, 자율성을 확대하고 만성적인 우정사업 적자를 해소하고자 합니다. 또 우정사업과 체신금융사업을 전담할 우정사업본부를 설치, 운영하고자 합니다. 이에 대한 대통령님의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구영보 국제협력관=급변하는 국제 정보통신 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시장 진출을 확대하기 위해 국제협력 활동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정보통신 주재관 파견을 확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미국, 유럽연합(EU),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 곳에 주재관을 파견해 놓고 있는 반면에 일본은 28개국에 해외 주재관을 두고 있습니다. 향후 주재관 조정작업시 스위스, 중국, 일본 등 거점 국가에 정보통신 주재관을 파견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날 정통부 업무보고에서 김 대통령은 배 장관에게 각별한 관심을 표시했다.
김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을 통해 “유럽에 가 있는 배 장관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어 `장관으로 수고해 달라`고 부탁했다”면서 “배 장관은 대기업 CEO 출신으로 시장경제에 밝은 분이니 여러분이 잘 협력해 오늘 보고한 정보통신 업무를 성공적으로 추진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대통령의 신임은 장관의 파워와 비례했다.
배 장관의 회고.
“김 대통령께서는 업무보고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셨습니다. 보고할 때도 `격식 없이 편하게 이야기하듯 하자`고 하셨습니다. 정통부를 떠나면서 제게 `배 장관이 전문가이니 책임지고 지식정보화 정책을 잘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날 정통부 대회의실 중앙에는 분홍색 진달래꽃 화분이 놓였고 벽에는 대형 동양화가 한 폭 걸려 있었다. 배 장관은 그림에 관해 일가견이 있었다. 배 장관의 부인은 서양화가 신수희씨였다. 그런 배 장관도 대회의실의 동양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배 장관의 말.
“김 총리서리가 그림을 보더니 `좋은 그림`이라고 하더군요. 아는 게 많은 김 대통령도 동양화는 잘 모르는 듯했어요. 김 총리가 그림을 보며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더군요. 그 해박함에 놀랐습니다. 김 총리가 하도 칭찬을 하기에 `그림을 총리실로 보내드릴까요` 했더니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더군요.”
김종필 총리서리는 동서양 고전을 섭렵한 독서광에다 서예, 그림, 악기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정통부 연례행사 중 가장 중요한 대통령 업무보고를 잘 끝낸 정통부는 지식정보화에 시동을 걸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