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머리에서 배운 논리와 이성에 일상 언저리에서 체득한 야성이 추가되지 않으면 종종 야유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가슴을 파고들지 못하고 머리만 아프게 만드는 공허한 담론이나 힘없이 무너지는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야성(野性) 없는 지성(知性)은 지루하고 이성(理性) 없는 야성(野性)은 야만적(野蠻的)일 수 있다. 이성은 논리적 훈련에 의해 습득(習得)되지만 야성은 신체적 접촉에 의해 체득(體得)된다. 습득보다 체득의 결과로 탄생한 야성이 설명력은 물론 설득력이 강하다.
야성은 야외(野外)에서 야영(野營)이나 야생(野生), 야유(野遊)하면서 체득되는 야심(野心)이자 야망(野望)이다. 여기서 야유(野遊)는 야유(揶揄)가 아니다. 야유(野遊)는 야외를 놀이터로 생각하고 거기서 즐겁고 신나게 노는 행위다. 창조는 놀이 충동에서 태어난다고 심리학자 칼 융은 말하지 않았던가. 나무와 풀, 꽃과 다양한 식물들을 벗 삼아 들판에서 뛰어 놀아야 남다른 상상력과 창의력이 용솟음친다. 지나친 보호막으로 사육한 아이보다 야생에서 뛰어놀면서 자란 아이가 야성이 있고 야망도 있다.
야성으로 무장한 사람은 야수(野獸)같은 기질이나 야생마(野生馬)의 속성을 지니고 있을지언정 야비(野鄙)하거나 야속(野俗)하지 않고, 야박(野薄)하거나 야만적(野蠻的)이지 않으며, 쉽게 야합(野合)하거나 남에게 야유(揶揄)도 보내지 않는다. 야성은 다양한 야전(野戰) 경험을 통해서 야물어진 야인(野人)들의 속성이며, 작은 일에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 야무진 성격이다.
야생에서 야인으로 자란 사람이 야성을 갖게 된다. 야생의 야인은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고 자라면서 야성을 기르고 야심(野心)을 불태우는 것이다. 야심만만(野心滿滿) 한 사람은 야수(野獸) 같은 기질을 갖고 있지만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해치지 않으며, 야심으로 야생마적(野生馬的) 기질을 발휘하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야심만만한 사람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불굴의 의지를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야망(野望)을 불태우는 사람이다. 광야(廣野)에서 야생한 사람일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視野)도 넓고 남다르다. 광야에서 야생체험을 해본 사람만이 광야를 내다보는 시력을 갖고 남다른 시각과 관점을 지닐 수 있다.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010000@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