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를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한 적이 있다. 김대중정부 시절이다.
새마을운동처럼 정보화를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하겠다는 야심찬 포부였다. 김 대통령의 지시였다. 시작은 창대(昌大)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운동은 1년이 조금 지나 미완(未完)의 국민 드라마로 막을 내렸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1998년 5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정보화 구호가 창공으로 울려 퍼졌다. 구호는 `1인 1PC, 1인 1홈페이지, 1인 1발명`이었다. 범국민 정보화운동의 신호탄이었다.
이 구호는 1970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 구호를 연상하게 했다.
새마을운동은 잘살기 운동이다. `근면, 자조, 협동` 정신으로 △농촌 근대화 △지역 균형발전 △의식 개혁으로 5000년 가난의 굴레를 벗어 보자는 게 목표였다.
이날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1층 소회의실.
정계와 산업계, 학계, 언론계 등 오피니언 리더 15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창립총회를 열고 새마을운동처럼 범국민 정보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구심체로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를 출범시켰다.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인 `21세기 정보화사회 구축`을 위한 정책진단 및 조언과 함께 새마을운동처럼 범국민 정보화운동을 전개한다는 게 설립 취지였다.
추진본부는 정보화 비전으로 △지식정보 국가 △정보기술 선도국가 △가상세계 중심국가 실현 등을 제시했다.
이날 창립총회는 오해석 숭실대 부총장(청와대 IT특별보좌관 역임, 현 가천대 교수) 사회로 진행했다.
“지금부터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창립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국민의례가 끝나자 정호선 국회의원(경북대 교수 역임, 현 CAB국회방송 회장)이 추진본부 창립 경과를 보고했다.
“지난 4월 7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앨빈 토플러 박사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범국민 정보화운동을 위한 단체 설립을 지시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발족준비위원회를 구성해 모두 5차례의 준비모임을 갖고 오늘 창립총회를 개최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 임시의장으로 선임된 노성만 전남대 총장이 사회봉을 잡고 정관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노 임시의장은 곧장 이사장 선임건을 총회 안건으로 상정했다.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를 대표할 이사장을 선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적임자를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용태 삼보컴퓨터 전 회장을 추천합니다.”
참석자들이 “동의한다”며 박수로 이용태 회장의 이사장 선임에 찬성했다.
“이용태 전 회장이 이사장에 만장일치로 선임됐음을 선포합니다. 이제 사회봉을 이 이사장에게 넘기겠습니다.”
앞좌석에 앉아있던 이용태 전 회장(숙명학원 이사장 역임, 현 퇴계학연구원 이사장)이 단상으로 올라와 노 임시의장과 악수를 나눈 후 사회봉을 넘겨받았다.
이용태 이사장의 회고.
“정보화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일은 내 임무였습니다. 그런 나로서는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의 설립취지가 좋았습니다. 정 의원의 간곡한 요청도 있었어요.”
이날 총회에서 참석자들은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장에 정호선 의원을, 부본부장에 오해석 숭실대 부총장, 감사에 이재규 한국과학기술원 교수(현 미디어경영대학원 교수)와 김영찬 중앙대 교수(한국교육학술정보원장 역임)를 각각 선임했다.
이사로는 국회에서 이태섭 의원(정무1장관, 과학기술처 장관 역임, 현 이화장학회 이사장)과 이상희 의원(과학기술부 장관, 대한변리사회장 역임), 정호선 의원, 학계에서 박찬석 경북대 총장, 이상일 서강대 총장, 김진현 서울시립대 총장(과학기술부 장관 역임), 오해석 숭실대 부총장, 노성만 전남대 총장, 양승택 한국정보통신대학원 총장(정통부 장관 역임), 연구계에서 정선종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 박원훈 KIST 원장, 언론계에서 김상영 전자신문 사장(회장 역임), 장대환 매일경제신문 사장(국무총리서리 역임, 현 회장), 박용정 한국경제신문 사장, 단체에서 원철희 농협중앙회장,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서강대 총장 역임, 현 숙명학원 이사장), 박상희 중소기업중앙회장(16대 국회의원 역임), 이철옥 한국청소년연맹 총재, 정보통신 업계에서 신윤식 하나로통신 사장(체신부 차관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회장), 곽치영 데이콤 사장(15대 국회의원 역임), 박희준 삼성전자 사장, 김영환 현대전자 사장, 서정욱 SK텔레콤 사장(과기처 장관 역임, 현 KT 고문), 정용문 한솔PCS 사장, 정장호 LG텔레콤 부회장(현 마루홀딩스 회장), 남궁석 삼성SDS 사장(작고, 정통부 장관, 국회 사무총장 역임), 김범수 LG-EDS 사장, 유명렬 코오롱정보통신 사장, 김종길 쌍용정보통신 사장, 황칠봉 데이콤ST 사장, 김용섭 대우정보시스템 사장, 김택호 현대정보기술 사장(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장 역임, 현 프리씨이오 회장), 김광호 포스데이터 사장, 이용태 삼보컴퓨터 전 회장, 이창배 프라임정보통신 사장, 김영훈 대성산업 사장(현 대성그룹 회장) 등 36명을 선임했다.
추진본부는 이날 각계 전문가와 협의해 제정한 정보화 기치로 `포인트(POINTS) 2010`을 선포했다. 포인트 2010은 한반도의 정보화, 네트워크화, 과학기술화를 의미했다.
추진본부는 2010년까지 세계 22위인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5위로, 정보화지수를 20위에서 5위로, 국내총생산도 현재 11위에서 5위로, 국제경쟁력도 35위에서 5위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또 국내 및 해외의 각계 전문가로 국내외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본부장 산하에 운영위원회와 산업정보화·지역정보화·국제정보화 등 10개 실무기획단을 설치하기로 했다.
해외자문단에는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박사를 비롯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루 거스너 IBM 회장, 그레이그 배럿 인텔 사장을 포함시키기로 했다.
추진본부는 정보화 정책 진단 및 단기 정책을 기획하는 1단계 단기 연구과제(1998~2000년)에 이어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화, 경제, 문화 정책을 기획하는 2단계 중기 연구과제(2001~2005년), 미래사회에 대비한 장기적인 국가 정책을 수립하는 3단계 장기 연구과제(2006~2010)를 수행하기로 했다. 하나 같이 원대한 구상이었다.
정 의원의 배경 설명.
“지난 4월 7일 김 대통령과 앨빈 토플러 박사가 접견하는 자리에서 `국민의 정보화를 위한 중심기구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김 대통령이 `그것 참 좋은 의견`이라며 나한테 추진기구 설립을 지시하셨습니다. 새마을운동 정신은 `근면, 자조, 협동`인데 한반도 정보화 구호는 `1인 1PC` `1인 1홈페이지` `1인 1발명`으로 정했습니다. 각계 전문가와 모두 5차례의 사전 준비모임을 가졌습니다.”
정보화 범국민운동은 1996년부터 정 의원이 구상했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정 의원은 오해석 숭실대 부총장과 남궁석 삼성SDS 사장, 곽치영 데이콤 사장 등과 기획안을 만들었다.
오해석 부총장의 회고.
“정보화 추진본부에 한반도라는 명칭을 넣는 것은 제 아이디어입니다. 1차로 국내 정보화를 추진하고 이어 북한까지 정보화 깃발 아래 하나로 뭉치게 하자는 의미였습니다. 실무작업에는 ETRI 등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전문인력을 지원받았습니다.”
추진본부가 출범하자 정보통신부는 그해 8월 4일 추진본부에 사단법인 설립을 허가했다.
그해 9월 9일.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는 서울 여의도 삼보컴퓨터빌딩 17층에서 창립 100일 축하행사 및 사무처 개소식을 가졌다. 이 사무실은 이용태 이사장이 무상 제공했다.
추진본부는 출범 후 정보화 소외계층에 컴퓨터 교육, 농어촌 컴퓨터 보내기 운동 전개 등을 의욕적으로 전개했다.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과 진념 기획예산위원장을 초청해 포럼을 열었고,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초청해 김대중 대통령과 면담을 주선했다.
정 의원의 말.
“지식정보국가, 정보기술 선도국가, 사이버세계 중심국가로 우뚝 서는 길은 오직 정보화에 달려 있습니다. 자라나는 꿈나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정보화`라는 구호 아래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욕적인 범국민 정보화운동은 1년쯤 지나면서 차츰 추동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우선 예산과 인력, 법·제도적 뒷받침이 없었다. 김 대통령의 정보화 신념과 의지도 후퇴했다. 김 대통령의 초기 국정 키워드는 `정보화`와 `외환위기`였다.
하지만 집권 후반기 들면서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수상, 세 아들의 비리연루로 인해 정보화는 국정 순위에서 뒤로 밀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추진본부 업무를 총괄하던 정 의원이 1998년 지방선거와 관련한 공천헌금 의혹에 휘말렸다. 그는 1999년 9월 국회에서 삭발투쟁을 하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2000년 4월 제16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후 추진본부는 개점휴업 상태로 접어들었다. 정보화 구호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이용태 이사장의 회고.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나는 정 의원에게 혼자 뛰지 말고 유력 정치 실세들을 이 운동에 참여시키라고 말했어요. 후원 세력이 필요한데 그게 잘 안 됐어요.”
정 의원의 말.
“1998년 6월 4일 지방선거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나주시장 공천헌금과 관련해 상대측이 문제를 제기했어요. 정치적 모함이었어요. 삭발투쟁까지 했지만 결국 16대 공천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해석 부총장의 말.
“정 의원의 정보화운동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처음엔 김 대통령과 독대해 국민운동이 탄력을 받았습니다. 그가 공천에서 탈락하면서 정치력을 상실하자 추진본부 활동도 흐지부지 됐습니다. 정치력 부재가 한 몫을 했어요.”
범국민 정보화운동의 이상(理想)은 높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더 높았다. 상향식이 아닌 하향식 국민운동의 한계였다. 정보화운동은 결국 미완의 운동으로 종언을 고했다.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