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본질적 가치부터 배워야

독일회사 화학공장에서 불이 났다. 모든 직원들이 공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도망갔다. 한국인 신입사원 한 명이 용감하게 불을 끄러 갔다. 다행히 화재는 잘 진압됐다. 그는 내심 뿌듯했다. 불을 끄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니 주변에서 인정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기자수첩]본질적 가치부터 배워야

부서 상사가 다소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격려의 포옹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갑자기 그의 뺨을 후려쳤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화학공장에 불이나면 제일 먼저 도망가는 게 원칙이다. 화재를 진압하는 것은 전문가들이 할 일이다. 자네 때문에 자칫 인명 피해가 발생할 뻔했다.”

독일 화학소재 기업에서 30년 넘게 일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이 일로 그는 2주간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후 그는 사고대응 매뉴얼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사고는 일어날 수 있지만, 사태 수습은 원칙과 매뉴얼을 따라야 한다. 독일이 화학소재 산업에서 100년 넘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이다.

지난해 경북 구미에서 불산가스가 누출된 이후 유독물질 누출 사고가 잇따른다. 유독물질 누출 사고 소식은 이제 지겨울 정도다. 국민들의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삼성·LG·포스코·SK 등 내로라하는 국내 대기업이 모두 유독물질 누출로 체면을 구겼다. 세계 선두기업의 반열에 우뚝 섰지만, 안전 관리는 후진국 수준을 못 벗어났다.

유독물질 누출보다 더 큰 문제는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려는 대기업의 태도다. 대기업조차 이러니 중소기업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다. 정부의 무능함도 여실히 드러났다. 사고 수습 대응이 늦은 탓에 구미 불산 사태를 키웠다.

지난해 10월 독일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기업은 곧바로 관계기관에 신고했고, 1시간 만에 인근 지역 및 도로가 통제됐다. 화학사고 전문가와 장비를 갖춘 소방대원 1000여명이 순식간에 출동해 단 하루 만에 사고를 수습했다.

우리나라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불산 등 유독물질은 위험하지만,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다. 그런 만큼 철두철미하게 관리돼야 한다.

파독 50주년을 맞은 올해, 제조업 선진국 독일의 화려한 성공 스토리보다는 안전을 중시하는 본질적 가치와 꼼꼼함을 배워야 할 때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