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운영하는 벤처회사가 모바일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으로 물류 업무 효율을 상당히 높일 사업 모델을 만들었다. 공동 추진하자며 공동 특허 출원까지 한 모 통신 대기업도 있었다. 그런데 대기업이 투자를 일 년 반이나 질질 끌었다. 이제 와 어렵다고 발을 뺐다. 벤처 사장은 좌절했다. 알고 보니 대기업 담당자가 지분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최근 정부 고위 관료가 모 대학에서 강연을 했다. 벤처기업 활성화를 위해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이 관료를 당황케 했다. 제발 정부가 방해나 하지 말라는 푸념이었다.
새 정부가 표방한 구호가 창조경제다. 이 구호가 이미 있는 기업만 잘 먹고 살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기업이 생겨나 경제 규모가 커지며, 이를 통해 창출한 부가가치로 고용과 소득이 증가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정부 관료들을 보면 여전히 기존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우리나라엔 미래 희망을 잃고 업종을 전환하는 이들이 꽤 많다. 해외 자본들도 한국보다 더 기회가 넘치는 동남아를 향한다. 사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동산 외에 별다른 경기 활성화 정책을 만들지 못한 대한민국 정부에서 누가 미래를 보겠는가.
벤처 문화는 또 어떤가. 스틸웰이란 사람이 있다. 서류 봉투만 있던 시절에 바닥이 넓은 쇼핑 봉투를 처음 만든 사람이다. 그는 새 봉투를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이 이야기가 지역 백화점까지 퍼졌다. 백화점은 그에게 백화점 전용 봉투를 맡겼다. 이후 세계로 확산됐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떠했을까. 백화점은 그 봉투를 본떠 사장 친척에 생산을 맡긴다. 개발자는 화가 나 소송을 한다. 백화점은 스스로의 아이디어라고 주장한다. 비싼 변호사도 고용한다. 동네사람들의 입을 금전으로 막는다. 결국 개발자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그 백화점 앞, 일인 시위다.
벤처 생태계의 윗물인 코스닥 시장을 보자. 외국과 기관 투자자들은 주가 놀이로 개인투자자들의 주머니를 턴다. 인수합병 시장은 복마전이다. 사기성 공시도 횡행한다. 금융 산업은 선진국 뒤꿈치도 쫓아가지 못하는 수준인데 금융시장은 다양한 금융 기법으로 무장한 해외 자본에 개방이 됐다. 벤처기업이 최악의 환경을 벗어나 겨우 성장 궤도에 올라 상장이라도 시켜놓으려 하면 공매도 등 대형 투자자 장난을 막느라 사업이 뒷전이기 일쑤다. 우리 벤처 생태계가 아직 체계가 부족하다. 대기업에 당한 분노로 가득하다. 투자사기에 얼룩졌다.
창조경제, 좋은 말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시스코, 구글, 페이스 북처럼 새로운 제품과 아이디어로 가치를 인정받고 신흥 대기업으로 속속 탄생하는 경제다. 기업가정신이 사라질 대로 사라진 우리나라에 절실한 새 경제 패러다임이다.
그렇다고 특정 국가의 제도를 적당히 차용하는 기존 정책으로 새 정부가 바라는 결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접근과 분석을 통해 정책 실패 확률을 줄이지 않으면 현 정부가 표방한 창조경제는 중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가치를 제법 인정받은 모 벤처기업이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으려 했다. 자본금이 5000만원이다. 벤처캐피털은 최대 1억5000만원 투자에 50% 가까운 지분율이 필요하다고 했다. 더 주면 정부 감사가 나온다는 이유였다. 기업 가치 산정을 하지 않고 구주의 몇 배수만 계산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태계에서 신 경제 창조를 바라는 건 누가 봐도 아니다. 창조경제를 하려면 정부부터 벤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 벤처기업이 대기업이 될 수 있으며 국가도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김병초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bckim@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