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뚜껑이 열렸다. 많은 게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새로운 게 없다. 알맹이가 빠진 듯 뭔가 허전하다. 미래창조과학부의 지난주 대통령 업무보고를 본 느낌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벤처 창업을 활성화하고 기초과학과 소프트웨어(SW), 콘텐츠 산업을 집중 육성해 40만 이상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 과학기술, 정보통신기술(ICT), 문화 등을 융합해 2017년까지 10개 신산업을 만들겠다. 그런데 무엇을 어찌 하겠다는 구체적인 플랜과 로드맵이 없다. 역대 정권이 기술 정책을 내놨지만 이렇게 모호했던 적이 없다.
군사 정권 시절엔 과학기술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KIST를 만들었으며 `과학기술입국` 슬로건도 내걸었다. 이 흐름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도 지속됐다. 군사 정권에서 과학기술은 `피`를 지울 만큼 참신했나보다.
과학기술을 시작으로 산업화가 성숙하자 새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ICT다. 김영삼 정권 때 싹을 틔우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절정을 이뤘다. 5개년 단위 `정보화 강국` 프로젝트가 지속됐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 ICT와 정보화를 주도했다. 이명박 정권 때 주춤했다. `녹색성장`이란 새 슬로건을 내놓았다. 그릇된 방향은 아니나 과학기술, ICT로 이어진 기술 정책 흐름과 생뚱맞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내걸었다. 성공 DNA가 뚜렷한 과학기술과 ICT 카드를 다시 꺼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그 산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9일 `과학기술인·정보통신인 한마음대회`에 참석해 “대한민국 제2의 도약을 이끌 창조경제 주역이 과학기술인과 정보통신인”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과학기술과 ICT는 지난 50년간 사람을 빼곤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에 그러했으며 앞으로도 우리 미래를 열 핵심 자산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그 집권 세력이 짧게는 이명박 정부, 길게는 15년간 언저리만 돌면서 잃은 촉이 문제다. 과학기술 정책은 군사정부, ICT정책은 문민정부 때로 단순 회귀한 느낌이 강하다. 과학기술은 70~80년대식이다. 벤처 창업과 SW, 콘텐츠산업 활성화, 심지어 40만개 신규 일자리 창출은 10여년 전 정책의 복사판이다.
구닥다리 레퍼토리라고 다 나쁜 게 아니다. 창조경제란 뜬 구름 잡는 말보다 `제2의 한강의 기적`이란 말이 솔직히 더 와 닿는다. 다만,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선친이 주창한 `과학기술입국`,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정보화강국`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이른바 `시즌 2`다.
과학기술과 ICT를 익혀 찌든 가난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또다시 그것으로 우리 삶과 산업의 질을 한 단계 더 높이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자. 과거 5년 단위 중장기 계획과 같은 장기 기술 프로젝트도 새로 만들자. 차기와 차차기 정권까지 군말 없이 이어받을 그런 계획이다. 그래야 경기 침체로 활력을 잃고 신음하는 우리 사회가 호응한다.
참신해야 한다. 이순이 넘어 발표했지만 싸이를 제치고 음악차트를 올 킬한 조용필의 신곡처럼 말이다. 그래야 민주 사회에서 자라고 글로벌 세상을 익힌 젊은층, 한물갔다고 하지만 경험과 지혜가 여전한 베이비부머까지 성장 동력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정부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시대는 지났다. 창조경제 주축도 결국 기업과 기술인이다. 이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실패한다. 지금까지 나온 정책 방향은 이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여러 차례 경제 위기를 극복한 일등공신임에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구겨진 자존심 회복에도 한참 모자란다. `맞아, 이 방향이야` 이렇게 기술인과 기업인이 고개를 끄덕일 대형 기술 프로젝트가 그래서 더 절실하다. 이게 창조경제 출발점이다.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