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33> PCS의혹검찰수사<4>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현 S&T 회장)의 마음은 쇳덩어리처럼 무거웠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 검찰의 PCS 의혹 수사와 관련해서였다. 대검 중앙수사부(이명재 검사장)가 PCS 의혹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보통신부 고위 간부들이 연루됐다는 말이 흘러 나왔다.

1998년 5월 하순 어느 날.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선 배 장관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통령님, 정통부 차관과 국장들이 비리에 연루됐다고 하니 장관으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민간기업에서 경영자로 일해 봐서 잘 압니다만 기업에서 무슨 말을 못합니까. 이번 PCS 의혹 건은 제게 맡겨 주시고 한번 선처해 주십시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비리나 뇌물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민간기업에서 경영자로 일하던 저를 장관으로 임명하신 후 차관과 국장들에게 `장관을 잘 보필해 지식정보화 정책을 잘 추진해 달라`고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배 장관은 이에 앞서 정홍식 차관(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이사장 역임)을 불러 비리 여부를 확인했다.

“정 차관, 혹시 문제가 될 게 있습니까.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정 차관은 “문제 될 게 하나도 없다”고 대답했다.

배 장관은 정 차관의 인품이나 언행을 볼 때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래서 청와대로 올라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반응은 냉담했다.

“배 장관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왜 그래요. 이럴 때는 모르는 척하세요. 공무원 비리는 보고만 있을 수 없어요.”

김 대통령의 어조는 단호했다. 배 장관은 더 이상 대통령에게 말을 하기 어려웠다.

배 장관의 회고. “김 대통령의 입장이 확고하니 그 다음부터 정통부 장관이 힘을 쓸 수 없었어요. PCS 수사는 김 대통령의 의지라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배 장관은 김종필 국무총리서리(국무총리, 자민련 총재 역임)에게도 구명을 호소했다. 배 장관은 자민련 몫으로 입각했다.

배 장관은 김 총리서리에게 “제가 데리고 일하는 공직자들입니다. 한번만 너그럽게 선처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김 총리서리는 현대 정치사의 풍운아였다. 그는 숱한 정치적 격동기를 겪었다.

김 총리서리는 “기업들이 돈을 줬으면 가만히 있지 왜 말을 해 문제를 만드느냐”고 했다.

배 장관에게 대통령 독대를 조언한 이는 오명 전 체신부 장관(건설교통부 장관, 과기부총리, 건국대 총장 역임, 현 동부그룹 반도체IT전자부문 회장)이었다.

배 장관의 계속된 증언. “오 전 장관은 고교 선배여서 공직 생활에 관해 많은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검찰수사에서 PCS사업자 선정에 정통부 고위 인사들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지자 오 전 장관이 공무원들의 억울한 심정을 대통령에게 말씀드리라고 하더군요.”

그해 5월 중순과 하순에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업체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정통부 고위공직자 2명을 구속했다. 잔인한 5월이었다.

그해 5월 27일. 대검 중수부는 정홍식 정통부 차관이 1996년 PCS사업자 선정 당시 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으로 근무하면서 모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를 잡고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아직 소환조사할 정도의 혐의는 확인하지 못했다”면서도 “혐의가 확인되는 대로 소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이 전해지자 정통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정통부의 반응은 한마디로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권력 핵심부인 청와대에서 10년, 정통부에서 10년간 근무하면서 탁월한 리더십과 업무 능력을 바탕으로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운 그가 “뇌물을 받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 차관은 이날 간부들에게 비리혐의를 강력 부인했다.

검찰 발표에 정통부 안팎에서는 두 가지 기류가 형성됐다. 하나는 PCS사업자 선정 후 감사원 감사에 이어 새 정부 출범 후 대통령직 인수위의 요청에 따라 감사원 특별감사를 받았으나 별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시 검찰수사로 이어졌다. 전 정권을 향한 현 정권의 의중이 담긴 정치적 표적수사라는 반응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석채 전 장관(현 KT 회장)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가 귀국하지 않는 바람에 아랫사람들이 다치게 된 것이라는 시각이었다.

검찰은 사업자 선정과정에 이 전 장관과 고교 후배인 김현철씨(현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했지만 이를 밝혀내지 못했다. PCS 의혹 수사는 시작부터 이 전 장관을 넘어 전 정권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특혜 의혹의 핵심으로 지목했던 이 전 장관 수사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공직자 비리수사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를 부인했다. 해당업체의 장부를 압수해 분석하다 드러난 비리라는 것이다.

당시 고위 공무원이었던 A씨의 말. “만약 이석채 전 장관이 국내에 있었다면 PCS 의혹 수사는 양상이 달라졌을 겁니다. 그가 국내에 없다 보니 흔히 하는 말로 호랑이는 못 잡고 대신 토끼를 잡은 격이죠. 검찰은 이 전 장관이 사업자 선정과정에 특정업체에 특혜를 줬을 것이라는 전제 아래 수사를 했지만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어요.”

대검 중수부는 그해 6월 1일 오후 2시 정홍식 전 차관을 소환했다. 대검 중수부는 정 전 차관이 PCS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업체로부터 뇌물을 받아 특가법상 뇌물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정 전 차관은 검찰에서 뇌물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검찰은 2일 오후 정 전 차관을 구속했다. 그에겐 일생일대의 시련이었다.

그해 6월 9일 오후. 대검찰청 김규섭 수사기획관(대검 강력부장, 수원지검장 역임, 현 변호사)은 PCS사업자 선정 비리 관련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수사 착수 두 달여 만이었다.

김 수사기획관은 정홍식 정통부 전 차관과 고위공직자 2명을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하고 김기섭 전 국가안전기획부 운영차장을 알선수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들에게 금품을 건넨 LG텔레콤과 한솔PCS 등 기업인에게는 계좌추적을 통해 정·관계 로비 혐의를 계속 수사한 후 추후 기소키로 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미국에 체류 중인 이석채 전 장관에게 유효기간이 1년인 체포영장을 발부받았으며 곧 영장사본을 소환장에 첨부해 미국 법무부를 통해 이 전 장관에게 전달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대검 중수부의 PCS 의혹 수사는 최재경 검사(대검 중수부장 역임, 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가 담당했다.

그해 6월 30일. 서울지법에서 정 전 차관 등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그는 법정에서 “기업체에서 돈 받은 일이 없다”며 검찰 쪽 주장을 반박했다.

그해 8월 11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재판장 이승윤 부장판사)는 정 전 차관에게 징역 2년 6월에 추징금 4300만원을 선고했다. 정 전 차관은 수표로 500만원을 받은 사실만 인정했다. 나머지는 부인했다.

정 전 차관 지인의 전언. “정 전 차관은 재판과정에서 일관되게 `업체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그는 청와대에서 10년간 근무한 사람입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면 청와대에서 10년간 근무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차기 장관 영순위였어요. 그런 그가 업체에서 뇌물을 받았겠습니까.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수표 500만원도 매월 만나는 모임에서 정 전 차관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낸 조의금이라고 합니다.”

이 지인에 따르면 정 전 차관이 계속 버티자 검찰은 그에게 “정통부의 갓파더(대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부하 공무원들을 구속시킬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그가 혐의를 계속 부인하면 정통부 공무원들을 잇달아 소환조사하겠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주변을 샅샅이 뒤져 그를 압박했다.

정 전 차관은 고심 끝에 자신이 책임지는 선에서 끝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정책 결정권자인 장관 대신 그가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당시 정 전 차관 구속에는 동정 여론이 많았다. 국회에서도 정 전 차관 구명에 나섰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진 털이식 표적수사라는 점 때문이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속 김형오 한나라당 의원(국회의장 역임, 현 부산대학교 석좌교수) 등 13명은 그해 10월 27일 열린 정통부 국감장에서 PCS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재판 중인 정 전 차관 등에 관대한 처분을 바라는 탄원서를 작성, 재판부에 제출했다. 국회의원들은 탄원서에서 “정 전 차관 등이 정보통신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큰 점을 감안해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밝혔다.

그해 11월 4일.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송기홍 부장판사)는 PCS사업자 선정 비리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정 전 차관 등 정통부 간부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정 전 차관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및 추징금 4300만원을 선고하고 석방했다. 정 전 차관은 살던 집을 팔아 추징금을 납부했다.

정 전 차관은 2000년 8월 14일 정부의 광복절 특별사면·복권조치에 따라 사면·복권됐다. 하지만 그의 청운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이 건에 대해 적절한 시기에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정 전 차관의 지인에 따르면 그는 “모든 게 `운명`”이라면서도 “가슴속에 회한이 남아 있다”고 전했다. 그가 공직자로서 건재했다면 그의 앞날은 어떠했을까. 미래를 결정하는 신(神)만이 아는 일이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