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그 해 추석 연휴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연휴를 보내고 업무에 복귀해서도 전조는 계속됐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흐를 정도로 후텁지근했다. 하지만 설마 했다. 더 더웠던 여름도 잘 넘겼는데 이 정도 더위는 충분히 버텨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ET칼럼]전력대란 위협 아직 끝나지 않았다](https://img.etnews.com/photonews/1304/421626_20130428161010_115_0001.jpg)
추석 명절 전 전력 유관기관 관계자는 “하계 전력수급 기간을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여름철 내내 풀가동한 발전소도 차례로 예방정비를 실시해 다가올 동계 전력수급 기간을 준비해야 겠다”고 했다. 여름철 비상기간도 끝나고 했으니 명절 연휴에 한 숨 돌리고 나와 겨울철에 대비하겠다고 했지만 출근 이틀 만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순간 이동했다.
2011년 9월 15일은 대한민국 초유의 순환정전이 일어난 기록적인 날이다. 하계 전력수급 기간을 마치고 계획대로 발전소 25기(834만㎾)를 멈추고 정비하는 사이에 늦더위가 덮쳐 사단이 벌어졌다. 이상고온으로 전력수요가 급증해 과부하가 발생했고 급기야 지역별로 30분씩 순환 정전을 시행했다. 전력수요가 너무 빠르게 증가해 전력경보 발령도 내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162만 가구, 은행·병원·기업 할 것 없이 순환 정전을 실시해 620억원 상당의 금전적 피해를 입었다.
일각에서는 당시 긴박한 상황에서 순환정전 결정을 재빨리 내리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블랙아웃 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예고 없이 내려진 순환정전 결정으로 주무부처 장차관이 공직에서 물러났고 실국장과 과장급 공무원도 중징계를 받았다. 현장을 맡은 한국전력과 전력거래소도 중징계를 피해가지 못했다. 과도한 처사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당시의 심각한 분위기는 말도 꺼내기 못하는 분위기였다.
9·15 순환정전의 가장 큰 원인은 잘못된 수요예측에 있다. 당시 전력 당국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에도 예년에 하던 것처럼 발전소 계획예방정비 일정을 강행했다. 안일했다는 지적이다. 이후 전력거래소는 전력수요를 예측할 때 기후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했고 1년 365일을 비상경계 체제로 임했다. 전력 관련 기관의 노력과 국민의 적극적인 에너지 절약 운동 참여 덕분에 9·15 순환정전 이후 두 번의 겨울과 한 번의 여름 피크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은 여전하다.
지난 23일 최신 원자력발전소인 신월성 1호기가 고장을 일으켜 가동을 멈춰서면서 순간 예비전력이 450만㎾ 미만으로 떨어졌다. 전력거래소는 전력수급 경보인 `준비`를 발령했다. 여름철 피크를 무사히 마치고 겨울철을 대비하다가 일어난 9·15 순환정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지금은 지난 겨울철 풀가동한 발전소를 멈추고 여름철을 대비해 계획예방정비 중이다. 전국 원전설비 23기의 전체 설비용량 2071만6000㎾ 가운데 791만6000㎾에 해당하는 9기가 고장이나 계획예방정비 때문에 정지 상태다. 지난주에는 일부 석탄화력발전소가 고장으로 멈췄고 다음 달에는 고리 2호기 등도 계획예방정비가 예정돼 있어 전력수급에 차질이 빚어질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이상 기후로 기온이 예년보다 높았다 낮았다하는 바람에 전력수요가 춤추는 상황이다.
산업통상자원부를 비롯한 전력유관 기관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전력상황을 챙기고 있어 순환정전이나 블랙아웃 같은 극단 상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과 기업이 함께 에너지절약을 실천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우리는 적어도 대형 발전소가 가동하기 시작하는 내년 중후반까지는 전력수급을 걱정해야 한다. 모든 국민은 정부 전력수급 정책에 협조하고 기업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무정전전원공급장치(UPS)와 비상발전기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한다. 이상기후는 봄을 여름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주문정 논설위원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