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중반 초,중고등학교 소풍에 필수품이 있었다. 더블데크 카세트라디오다. 춤,노래 반주는 물론이고 조금 노는 멋쟁이의 소품으로도 그만이었다. 더욱이 `산요(SANYO)`나 `나쇼날(national)` `소니(SONY)` 같은 일본산 제품로고가 붙어있는 제품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더블데크뿐만 아니었다. 이들 기업은 TV·소형카세트플레이어·전지·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했다.
![[ET칼럼]산요의 교훈을 잊지 말자](https://img.etnews.com/cms/uploadfiles/afieldfile/2013/05/26/432687_20130526224018_323_0002.jpg)
전자왕국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일본 전자기업의 오늘날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소니 등이 과거의 영예를 되찾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지만 쉬어보이지는 않다.
최근 일본 언론엔 파나소닉이 자회사에 편입한 산요 소속 임직원 90%를 감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상 해체수순이다. 산요는 한 때 가전뿐만 아니라 전지·디스플레이·반도체·휴대폰·생활가전 등 사업을 전방위로 확대하며 소니·파나소닉·샤프 등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종합 전자 기업으로 꼽히기기도 했다. 거품경제 붕괴와 잃어버린 10년 등의 영향으로 2000년대 들어서면서 경영이 악화했다. 2009년에는 파나소닉이 산요를 인수해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산요는 파나소닉에 인수된 후에도 소형 디지털 캠코더와 소형 이차전지 시장에서 선두권을 다퉜지만 모회사가 된 파나소닉의 적자와 시장 점유율 하락 등으로 인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해졌다. 한때 매출액 20조원을 웃돌던 일본 대표 전자기업 가운데 하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설립 63년 만이다.
산요가 해체수순에 들어간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거품경제 붕괴와 엔고 외에도 대한민국의 맹추격을 들 수 있다. 잘 나가던 소형 이차전지 사업마저 삼성SDI와 LG화학에 밀려났다. 삼성과 LG의 패스트 팔로어 전략에 일본 종합전자기업의 시장 지위가 낮아진 꼴이다. 시장 환경은 늘 바뀌고 영원한 1위는 없다. 호시탐탐 1위를 넘보는 기업이 즐비하다.
이제 우리 차례다. 지금은 삼성과 LG가 대부분의 정보기술(IT) 제품 분야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지만 언제 다시 뒤집힐지 모른다. 가장 무서운 경쟁상대는 하이얼 같은 중국 기업이다. 중국 기업 기술 수준이 우리보다 많이 낮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판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유럽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과거 양판점 구석에서 먼지만 쌓이던 삼성과 LG 가전제품이 일본 제품 틈바구니를 뚫고 진열대 앞쪽으로 나왔을 때와 흡사하다. TV·냉장고·세탁기는 물론이고 휴대폰 등 첨단 스마트 기기 분야 기술력도 우리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을 수준이다.
5년 후 하이얼의 모습은 어떨까. 상당수의 IT 전문가가 “두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일하게 한국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지만 든든한 중국 내수를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을 야금야금 접수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다.
디지털기기 경쟁구도는 과거 미국·유럽·일본·한국 기업이 등장하는 `춘추전국시대`에서 `일본 대 한국`으로 변했고 최근엔 `삼성 대 애플` 양상으로 발전했다. 앞으로는 `한국 대 중국` 또는 `삼성 대 하이얼` 경쟁구도를 넘어 승자독식 구조로 갈 가능성도 있다. 첨단 분야일수록 승자독식 구조가 일반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내놓은 지 10여년 만에 일본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반면에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 20년으로 장기화했고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모습이 됐다. 똑같은 상황이 무대만 바꿔 `한국 대 중국`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일본의 교훈을 잊지 말자.
주문정 논설위원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