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소프트웨어(SW) 업체 A사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한 대형 금융사가 모바일 뱅킹 사업에 계약 없이 급하게 인력을 투입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빠듯한 재정에서 외주까지 써가며 사업을 수행했지만 금융사는 계약을 번번이 미뤘다. 결국 6개월에 걸쳐 프로젝트를 완료한 후에야 처음 약속했던 가격보다 5% 낮은 금액으로 계약을 했다. A사 관계자는 “사업 도중 계약을 하는 사례는 종종 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사실상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고 토로했다.
#한 대기업의 시스템통합(SI)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SW 업체 B사는 얼마 전 중도 하차를 결심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대기업 임원의 요구가 늘어나자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항의도 해봤지만 대기업은 “제안요청서(RFP)에 내용이 다 들어 있다”며 요구를 관철시켰다. B사 대표는 두루뭉술하게 작성된 RFP를 살펴보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SW 업계에서도 `갑을관계 청산`이 이슈로 떠올랐다. 대기업, 금융기관, 공공기관 등 발주처의 횡포가 만연해 산업 생태계를 흐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SW 업체들은 정부가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설 것을 주문했다.
A사의 사례는 SW 업체들이 가장 빈번하게 겪는 일이다. 발주처에서 급하게 인력 투입을 요청하고 정식 계약은 차일피일 미루는 일은 웬만한 SW 업체라면 겪어봤을 정도라는 게 업계 반응이다. 사업 중간이나 종료 후 계약을 할 때 영세한 SW 업체는 유동성에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중대형 프로젝트는 보통 발주처와 수주처 사이에 수많은 업체가 개입된다는 점이다. 대기업은 보통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형 SI 업체와 계약을 한다. SI 업체는 또 다른 계약으로 다양한 SW 업체와 협력한다. SW 업체도 자체 인력으로는 사업이 어려워 외주 인력을 활용한다. `거치는 손`이 많아질수록 SW 업체의 수익은 떨어지는 것이다.
구두로 계약금액을 정하거나 계약 후에도 A사처럼 가격 인하 요구를 받기도 한다. 또 다른 모바일 SW 업체 C사는 대기업 프로젝트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사업을 추진하던 중 발주처에서 10% 가격 인하 요구를 받았다. 발주처는 다른 업체는 더 낮은 금액으로 사업 수행이 가능하다고 이유를 댔다. C사는 공개입찰을 거쳐 사업자를 결정한 후 타사 견적을 확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항의했지만 발주처와의 관계를 고려해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RFP를 불확실하게 작성한 후 SW 업체에 추가 사업을 요구하거나, 일방적으로 발주처가 사업을 연기하는 사례도 지적됐다. 대금 지급 시 현금 대신 어음을 주거나, 프로젝트 수행 중 눈여겨 본 SW 인재를 대기업이 영입하는 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향후 사업 관계를 고려해 대부분 항의 없이 손해를 감수해 왔으며, 발주처는 관습처럼 횡포를 부린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일부 공공기관과 대기업은 이 같은 관행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라며 “정부가 제도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유선일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