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운영책임자(COO) 출신 브라이언 크라자니치의 인텔 CEO 임명은 생산·공급망 분야에서 인텔의 큰 변화를 예고한다. `재무통` 폴 오텔리니 전 CEO와 달리 인텔이 전통적으로 강점을 가진 생산 현장 혁신이 속도를 낼 것이란 기대다.
마치 COO 출신 팀 쿡 애플 CEO가 무대 전면에 등장했을 때처럼 인텔의 공급망 혁신이 이뤄온 숨은 성과가 다시 조명을 받는다. 과거 크라자니치가 이끌었던 인텔의 공급망 전략은 복잡한 반도체 공정을 관리하면서 제시간에 빠르게 칩을 공급케 해 PC 시대 제왕을 유지한 핵심 무기다. `무조건 예라고 답하라(Just Say Yes)` 프로그램이 그 결정체다.
수년간 인텔의 주문·생산·조달 방식을 바꾸면서 물밑으로 추진해 온 이 프로그램의 결과는 숫자가 보여준다. 칩 제조 시간은 65% 빨라지고 재고는 32% 줄었다. 주문부터 배송에 걸리는 시간은 50% 단축했고 고객 주문을 받고 납기 일자를 알려주는 시간은 네 배나 빨라졌다.
◇복잡한 제조 공정에 변덕스러운 주문까지 골치 아픈 PC 시장
2000년대 초 인텔이 직면한 큰 장애물은 칩 제조 공정이 복잡해졌는데도 PC 제조사가 수시로 주문을 바꾼다는 점이다.
더 빨리 제품을 보내야 하지만 회로 선폭은 좁아지고 공정은 세분화돼 생산 도중 칩을 바꾸기는 더 어려워졌다. 몇 개월이 소요되는 반도체 주문 생산 과정에서 웨이퍼를 자르고 특수 공정을 거쳐 패키징해 완성하기까지 중간 단계에서 다른 목적으로 바꾸긴 어렵다. 되돌린다 해도 드는 비용이 막대하다.
2000년 초 세계 16개 공장, 30개 창고에서 출하한 칩을 전 세계 PC 제조사에 납품하던 인텔은 하루에 100만대, 연 75만번의 주문을 받았다. 이 가운데 주문대로 납품되는 비율은 고작 1%에 그쳤다. 99%의 숫자가 바뀐 것이다.
PC 제조사가 `A칩 100개를 언제까지 납품해줄 수 있는지` 물어도 `0월 00일까지 95개 납품 가능하다`고 답하는 데만 15일이 걸렸다. 제품 종류는 더 늘었다. 무선 컨트롤러와 소프트웨어,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가 더해진 수많은 제품을 각기 다른 사업자에 공급해야 하면서 고충은 심각해졌다. JSY 프로그램은 이 고민에서 시작했다.
◇주문부터 생산·조달까지 다 바꿔
JSY는 어떤 주문 변경과 질문에도 `예`라고 답하는 새로운 철학을 세우고 업무 방식을 다시 정했다. 낭비를 줄이려면 우선 정확한 계획이 필요했다.
무려 3~6개월치 주문량을 미리 약속하던 PC 제조사와 인텔 간 주문 업무 방식을 바꿨다. PC 제조사가 주문을 낼 때마다 사용한 물량을 계산해 이를 채우는 업무는 인텔이 맡기로 했다. PC 제조사가 직접 주문 물량을 관리해야 하는 기간을 초창기 세 달에서 1단계(2005~2007년)에서 두 달, 2단계(2008~2010년)에서 한 달로 줄였고 지금은 2주까지 단축했다.
이수진 인텔 PMBO(제품·마케팅·비즈니스·운영) 매니저는 “과거엔 PC 제조사가 주문한 양을 계산해 공급받을 물량을 고쳐 계산하는 데 업무의 50% 가까운 시간을 들여야 했다”며 “인텔이 이 업무를 대신 맡고 PC 제조사는 주문만 하면 되도록 바뀐 것”이라고 말했다. PC 제조사는 주문 실행에 따른 물량 변경이 아니라 `PC가 얼마나 팔릴 것인지` 예측하고 칩을 주문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주문량은 더 정확해졌고 변경 횟수는 줄기 시작했다.
그 대신 인텔은 더 정확히 시장 수요를 예측하고 이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자 애썼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판매·생산·마케팅·영업 간 `콜레보레이션 미팅`을 했다. 자주 머리를 맞대고 더 정확한 수요량 예측에 공을 쏟았다. 정보 분석 역량을 기르고 PC제조사와 정보 공유 폭도 넓혔다.
이제는 PC제조사가 2주치 주문을 내면 3개월치 나머지 물량과 계획을 인텔이 자동으로 계산해 알려준다. 과거 3~6달 앞서 했던 주문을 이제는 2주 전에만 내면 된다. 인텔은 이 사례를 내부적으로 `커밋 프로세스 리엔지니어링(CPR)`이라 부른다.
◇창고에서 직접 빼가세요
JSY 프로그램 일환으로 이뤄진 조달 혁신은 `주문량만큼 갖다 주던` 기존 공급 방식의 변화다. PC 제조사 공장 근처에 일종의 허브 창고를 만들어 칩을 갖다 놓은 후 원할 때 칩을 빼갈 수 있도록 한 벤더관리재고(VMI) 방식을 도입했다.
PC 제조사 입장에서는 미리 반도체를 살 필요가 없어져 재고 부담을 덜 수 있다. 하지만 공급자가 재고 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에 계획의 80% 이상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2007년 파일럿 VMI 프로젝트를 시작한 후 확산을 시작해 올 상반기 대부분 주요 PC 제조사와 VMI 방식으로 칩을 공급하고 있다.
하나의 VMI 창고에서 여러 PC 사업자가 제품을 가져간다.
PC 제조사는 답답함을 덜었다. 모든 재고·생산 데이터를 통합해 담당자가 주문을 넣는 즉시 칩이 납품 가능한 날짜와 양의 답을 실시간 확인 가능하다. 2단계에서 시행했던 JSY 프로젝트 이전엔 이메일로 주문을 받은 후 관련 재고와 생산 상황을 확인해 답을 주는 데 2주 가까이 걸렸다.
인텔 관계자는 “JSY 프로그램으로 PC 고객의 반응 시간을 높이고 재고를 줄이는 데 중점을 뒀다면 이제 원가와 제품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유연한 공급망 혁신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