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경영권을 거머쥘 것인가.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통합회사 경영권 다툼은 포성 없는 전쟁이었다. 경영권을 놓고 LG와 현대그룹의 샅바싸움은 치열했다. 반도체 빅딜의 형식은 기업 자율이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주도한 구조조정이었다. 정부는 당시 반도체 공급 과잉을 이유로 반도체 빅딜을 강행했다. 자율 빅딜 뒤에는 청와대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기업 구조조정을 재벌 개혁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현대와 LG는 반도체 사업을 그룹에서 분리해 통합회사를 만들자는 원칙에 합의했지만 경영권을 놓고는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뺏느냐 빼앗기느냐`의 갈림길에서 두 그룹의 갈등은 비등점을 향해 치달았다.

1998년 9월 10일.
이문호 LG 구조조정본부장(LG캐피탈 부회장, LG 인화원장 역임, 현 천안연암대학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반도체 사업 양보 불가 방침을 밝혔다.
“반도체는 LG그룹의 주력사업으로 절대 양보할 수 없다. 또 반도체 생산량이나 재무구조 등을 따져 봐도 LG가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
이 본부장은 LG그룹의 반도체 사수 의지를 대내외에 표명했다.
두 그룹은 그해 9월 3일 `단일회사 설립을 위한 지분 비율은 계속 논의한다`는 원칙에 따라 수차례 접촉을 갖고 경영주체를 논의했으나 전혀 진전이 없었다.
현대 측은 자산과 세계시장 점유율 우위, 독자기술력 등을 이유로 경영권을 갖고 지분비율은 7 대 3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현대 측은 “반도체산업은 타이밍 산업으로 대규모 투자결정을 신속하게 하려면 경영주체가 분명해야 한다”며 “기술력과 시장점유율이 앞선 현대가 경영권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LG 측은 그룹의 주력이 전자·정보통신이고, 재무구조와 기술력, 생산량에서 현대를 앞선다며 경영권을 자신이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LG는 공동 경영을 하려면 5 대 5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나서 경영주체에 대한 자율합의를 시도했으나 중재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었다.
그해 10월 7일 오전.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서강대 총장 역임, 현 숙명학원 이사장, 삼성꿈장학재단 이사장)이 전경련 회관에서 5대 그룹의 사업 구조조정안을 공식 발표했다.
조정안에서 반도체는 LG-현대의 합병을 전제로 10월 15일까지 전문 컨설팅회사에 의뢰, 11월 30일까지 지배주주 및 책임경영 주체를 결정하고 통합법인의 지분 비율은 7 대 3으로 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와 LG 간 자율합의가 안 돼 결국 책임경영 주체 선정을 외부 전문평가기관에 맡긴 것이다.
손 부회장은 “구조조정 협상은 경쟁력 제고를 염두에 두고 국민경제 부담을 최소화하는데 주안점을 뒀다”며 “반도체는 자산 실사와 경영주체 선정을 동시에 진행, 통합법인의 출범 준비를 12월 말까지 완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손 부회장은 양측에 다섯 개씩 평가기관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양측이 추천한 기관이 있으면 그곳에 평가를 맡기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양측이 낸 명단에는 한 곳도 일치하는 기관이 없었다.
손 부회장은 다시 세 개씩 제출해 달라고 했지만 한 곳도 일치하는 기관이 없었다. 당초 시한인 15일을 하루 넘긴 16일 베인&컴퍼니와 AT커니 2개사로 압축했다. 그러나 2개사 중 한 곳을 선정하기 위한 협상도 무산됐다.
손 부회장은 그해 11월 4일 제3의 평가기관으로 미국의 아서디리틀(ADL)을 추천했다.
손 부회장의 말.
“양측이 추천한 평기기관 후보를 놓고 평가기관의 공정성 문제로 인해 합의를 하지 못해 제3의 후보로 ADL을 천거하게 됐다.”
ADL은 1886년 미국 보스턴에서 출발한 세계 최초의 경영 컨설팅업체로 당시 30여개국에 52개 지사를 두고 있었다. 한국에는 1996년 11월 진출했다. 이 업체는 당시까지 현대나 LG그룹 어느 쪽과 일한 적이 없었다.
그해 11월 11일.
LG와 현대는 이날 반도체 통합을 위한 외부 전문 평가기관으로 전경련이 추천한 ADL로 합의했다.
손 부회장은 이날 “LG와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가 각각 ADL 추천안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측이 합의해 평가 작업이 시작됐지만 양측의 태도는 대조를 보였다.
현대는 ADL에 최대한 협조했다. 요구하는 자료는 모두 제공했다. 외부인에 공개를 통제하던 반도체 생산시설도 공개했다.
이에 비해 LG반도체는 비협조적이었다. 자료협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공장 실사에 응하지도 않았다.
LG반도체 관계자 L씨의 말.
“한마디로 LG는 현대전자를 인수하기도, LG반도체를 인수당하기도 싫다는 입장이었다. 이를 뒤집어 보면 정부 빅딜에 반대한다는 의미였다.”
대기업 빅딜이 지지부진하자 정부가 전면에 나섰다. 채권은행을 움직여 5대 그룹에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그해 12월 7일 오후 4시.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제6차 재계·정부 정책간담회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와 재계는 5대 그룹의 구조조정 추진을 위한 합의문을 채택했다. 이날이 빅딜의 분기점이 됐다. 합의문 채택은 의미가 남달랐다. 기업 자율 빅딜에서 5대 그룹이 정부와 국민에게 구조조정을 약속한 어음이나 다름 없었다.
이날 간담회 시작 분위기는 무거웠다. 김 대통령이나 참석자들 모두 사안의 중대성을 반영하듯 표정이 어두웠다. 간담회는 2시간 10분간 계속했다. 김 대통령의 인사말에 이어 김우중 회장을 선두로 이건희-정몽헌-구본무-손길승 순으로 5대 그룹별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역임, 현 코레이 고문)의 낭독으로 합의문이 채택된 뒤에 비로소 표정이 밝게 변했다.
이날 채택한 합의문은 △핵심 분야 중심의 사업구조 개편 △상호 지급보증 해소 △실효성 있는 재무구조 개선 △경영투명성 제고 △정부와 채권금융기관의 역할 등 5개 분야였다.
이 가운데 반도체 빅딜과 관련한 실천사항으로 △5대 그룹은 주채권은행과 체결한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성실히 이행해 1999년 말까지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축소하도록 한다 △5대 그룹 주채권은행은 그룹별 재무구조 개선약정 이행 상황을 월별로 점검하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출자전환 등을 통해 재무구조 개선을 지원한다 △주채권은행과 금융감독원은 각 그룹의 재무구조 개선약정 이행 상황을 철저히 점검·감독해 약정이 반드시 이행되도록 한다 △5대 그룹은 사업 구조조정을 연말까지 완료하고 통합법인의 경영정상화가 조속히 이루어지도록 노력한다 등에 합의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대기업 구조개혁은 우리 기업의 경쟁력 제고에 결정적인 조건이 될 것”이라며 “오늘은 우리 경제를 위해 전환점을 긋는 역사적인 날로, 기업이 성실히 노력하고 결단해준 결과”라고 치하했다.
김 대통령은 “5대 그룹은 핵심기업 중심으로 사업역량을 집중, 선단식 경영을 끝낼 때가 됐다”며 “정부는 개혁에 힘쓰지 않고 국제 경쟁에서 이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기업은 국민을 위해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김 대통령은 “5대 그룹은 고도성장의 공도 크고 한국경제가 이렇게 된 데 책임도 있으므로 다시 살리는 데도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간담회에는 정부에서 박태준 자민련 총재(작고, 국무총리 역임)를 비롯해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장 역임), 박태영 산업자원부 장관(작고, 전남도지사 역임),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대통령 비서실장, 감사원장 역임, 현 조선대 석좌교수),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정통부·재경경제부 장관 역임, 현 군산대 석좌교수)과 재계에서 김우중 전경련 회장대행, 이건희 삼성, 정몽헌 현대(작고), 구본무 LG, 손길승 SK 회장과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 채권은행단 대표 5명이 참석했다.
김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경고성 발언도 잊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외부평가기관의 평가결과에 따라 12월 25일까지 핵심 경영주체 선정을 완결하되 그렇지 못하면 귀책사유가 있는 기업에 금융제재 조치를 내리겠다”고 밝혔다.
강봉균 경제수석은 이날 간담회와 관련, 청와대 기자실에서 “1주일 전부터 작업을 시작해 여러 차례 내용을 다듬고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렸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 L 비서관의 설명.
“6차 간담회를 앞두고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헌재 금융감독원장, 강봉균 경제수석 등이 4일 저녁부터 만나 정부의 정책 방안을 만들어 5일 김 대통령에게 윤곽을 보고했습니다. 이어 그 틀 안에서 이들이 5대 그룹 총수와 주채권은행장, 5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잇따라 접촉했습니다. 7일 최종안을 확정한 것으로 압니다.”
김 대통령은 이날 구조조정 합의안을 확정한 뒤 간담회 참석자들과 만찬을 했다. 숙제를 끝낸 학생들처럼 만찬은 1시간 15분간 홀가분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이날 김 대통령은 3시간 15분 동안 5대 그룹 총수들과 시간을 같이 했다. 그만큼 김 대통령의 5대 그룹 구조조정 의지는 확고했다.
이헌재 금감위원장은 12월 8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LG가 독자생존을 자신하며 비협조적이다. 빅딜이 결렬되면 약속대로 귀책사유가 있는 기업에 강력한 제재조치가 내려질 것”이라며 LG를 압박했다. LG의 반도체 빅딜 결단을 촉구하는 시그널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