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까먹어야 하지만 친구와의 약속은 까먹지 말아야 한다. 호두는 까먹어야 제 맛이지만, 하겠다고 다짐한 자신과의 약속은 까먹지 말아야 한다. 귤은 까먹어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은 까먹지 말아야 한다. 잣은 까먹어야 하지만 오늘 하기로 결심한 사항은 까먹지 말아야 한다. 바나나는 껍질을 까먹어야 하지만 주기적으로 해야 되는 운동은 까먹지 말아야 한다. 지금 내가 까먹지 말아야 하는데 다른 바쁜 일로 까먹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소중한 일을 까먹고 중요한 일을 까먹지 않고 계속 반복하다보면 삶은 점점 더 바빠지고 피폐해지기 시작한다.
소중한 일은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당장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까먹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일은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기에 소중한 의미와 가치가 없어도 허겁지겁 처리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인간에게 망각 능력도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까먹어도 되는 것을 까먹지 않고 골머리를 앓거나 심각한 고민을 거듭하는 경우가 있다. 뇌는 기억하는 기능도 갖고 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나 추억을 잊어버리는 기능도 있다. 아픈 상처, 서러운 이별, 슬픈 사연일수록 잊어버리면 좋지만 그런 상처와 사연일수록 뇌는 더욱 집착이 생겨서 잊질 못한다. 기억력도 중요하지만 망각 능력도 중요한 시대, 모든 걸 다 기억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삶도 없을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까먹지 말아야 될 것을 까먹고 까먹어도 될 것을 까먹는다는 점이다. 인간의 기억력도 그 사람의 의지와 관련 있다고 볼 때 의도적으로 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뇌 속에 잠재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아픈 추억이나 슬픈 사연을 생각할 시간을 의도적으로 주지 않고 다른 일로 바쁘게 보내는 방법도 까먹지 않고 집착하려는 뇌의 기억기능을 상쇄시키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010000@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