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기고]한국 진공산업의 현주소

일반적으로 진공이라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진공청소기나 진공포장 정도다. 하지만 진공기술은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돼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전문가기고]한국 진공산업의 현주소

활용 예를 들어 보면, 의약품 제조 및 식품 공정, 스마트폰·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첨단제품 공정, 우주항공, 핵융합발전 등 다양하다. 미래산업과 첨단 과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진공기술이 응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진공기술이 이렇게 많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진공상태와 같이 아무것도 없는 청정 환경에서 만들어진 소재와 부품이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최근 출시된 55인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만 하더라도 진공 공정기술로 제작된 신기술 제품이다. 시장조사업체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약 1100만원에 팔리는 55인치 OLED TV 디스플레이 패널 원가는 같은 크기의 LCD 대비 6.6배에 달한다. OLED TV 가격이 비싼 이유는 생산수율이 낮기 때문이다. OLED TV가 LCD TV처럼 대중화되려면 수율이 높아져야 하고 여기에 바로 진공기술이 필요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품은 대부분 높은 진공상태를 유지하는 진공기계설비 내에서 생산되고 있다. 진공 공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진공전문 업체가 공급하는 진공펌프·소재·부품·설비가 필요하다.

이처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의 핵심에는 진공기술이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 정책담당자나 관련 업계에서도 진공기술을 아무나 개발하는 보편적인 기술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향후 우리나라 먹을거리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분야인 진공기술의 발전에 이제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선진국인 독일·미국·일본은 역사적으로 진공산업을 주요 제조업 가운데 하나로 육성해왔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과학기술 발전이 늦었던 한국은 대기업인 소자업체부터 설비업체 순으로 그 우선순위가 잘못된 채 성장했다. 무엇보다 기초 기반기술이 되는 핵심 진공기술이 후 순위에 밀려있다 보니 아직도 그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진공연구조합은 1999년 관련 업계 19명 대표가 뜻을 모아 결성한 단체로 과학기술부 산하조직으로 출범했다. 현재는 참여사가 74개 업체로 늘어났고, 지난 정부 지식경제부, 새 정부에서는 미래창조과학부 산하로 배치돼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진공산업 발전에 필요한 연구개발(R&D) 예산은 전혀 책정되지 않았다. 첨단기술산업 기반이 되고 창조경제 핵심인 진공산업이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해 관련 지원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새 정부는 창조경제를 먼 곳에서 찾지 말기 바란다. 정책의 우선순위만 바꿔도 그 효과가 창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만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 시작은 어느 분야에 우선순위를 먼저 둬야 하는가를 재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한다.

그동안 예산 지원이 전혀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태양광소자, LED산업 등을 지원하는 기초기술산업으로 발돋움해온 진공산업에 정부의 관심을 기대한다. 이는 현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고 있는 진공산업계 관계자를 격려하고 창조경제의 핵심 축의 하나로 자리매김시키는 좋은 단비가 될 것이다.

백충렬 한국진공연구조합 이사장 choong-ryul_paik@ulva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