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우수성이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키보드 영문자판 배열이 대표적이다. 타자기 엉킴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어진 쿼티 자판 배열은 오늘날 모바일 기기에서도 널리 쓰인다. 1936년 타이핑 효율성을 높인 드보락 방식 자판이 나왔지만 이미 사실상 표준이 된 쿼티 자판을 넘지 못했다. VCR 시장에서 일본 소니 베타방식이 기술적 우위에도 배타적 정책 때문에 VHS 방식에 시장 표준 자리를 내준 사례도 있다.
기술적 우수성보다는 시장을 선점하고 표준이 되는지가 더 중요한 때가 많다. 특히 `네트워크 외부성`이 존재하는 경우가 그렇다. 네트워크 외부성은 이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모두가 누리는 혜택이 커지는 현상을 말한다. 페이스북처럼 사용자가 많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PC나 모바일 플랫폼은 더 많은 사람이 쓸수록 호환되는 소프트웨어(SW)가 많아지고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쏠림현상은 심해진다. 통신 산업도 마찬가지다. 네트워크 장비에서 단말에 이르기까지 세계 표준에 맞는 제품이 우선적으로 공급되기 때문에 더 많은 국가가 단일한 통신 표준으로 수렴하게 된다.
이렇게 시장구도가 만들어지면 기술적으로 우수한 경쟁 상품이나 서비스가 등장해도 쉽게 대세를 바꾸기 어렵다. 따라서 네트워크 외부성이 있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는 자국의 기술을 세계 표준으로 만들고 먼저 상용화해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두고 국제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국제적 공조가 이뤄지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국제적 경쟁과 공조의 중심에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이 있다. UN산하 기구인 ITU는 ICT 관련 글로벌 표준 제정과 주파수 대역 분배 기구로 잘 알려져 있다. 국제적 통신접속 및 정산, 개도국에 대한 기술협력과 원조활동 등 ICT를 활용해 글로벌 동반성장을 추진하고 있다. 모두 국가적 이해관계 상충을 줄이고 생태계를 더욱 확장하기 위한 활동들이다.
반면에 ITU는 각국이 자국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해 말 망 중립성 이슈가 ITU에서 논의됐지만 치열한 신경전 끝에 차기회의로 유보되기도 했다. 데이터 트래픽이 폭증하면서 통신망 증설에 필요한 막대한 투자비를 놓고 입장이 제각각 나뉘었기 때문이다. LTE가 상용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5세대 이동통신 표준 논의도 시작됐다. 차세대 초고선명(UHD)TV 표준을 둘러싼 기싸움도 치열하다. 향후 ICT 산업의 주도권을 좌우할 중요한 의제들이다.
마침 ITU 최고의결회의인 전권회의가 내년 10월 부산에서 개최된다. 4년마다 열리는 ICT 분야 최고 정책결정회의라는 점을 고려해 `ICT 올림픽`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얼마 전 ITU전권회의 의장직을 수행할 예정자가 정해졌다. 전권회의 의장은 2014년 전권회의는 물론이고 2016년까지 3년간 ITU 이사회에 참여하면서 ICT 외교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나라는 1989년 이사국 진출 후 여섯 번 연속 이사국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사무총장 등 고위직에는 단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기에 ICT 부문의 세계적 위상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권회의는 대한민국이 ICT 분야 외교강국으로 부상하고 글로벌 정책을 선도하는 위상을 찾을 좋은 기회다. ICT의 향배를 가를 굵직한 이슈가 산적해 있는 만큼 내년 ITU전권회의 개최국으로서의 역할도 크다. 1년 남짓한 기간, 성공적인 전권회의 개최를 위해 우리 모두의 관심과 면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설정선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KTOA) 상근부회장 12jss@kto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