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42>남궁 석 정통부 장관

누가 새 장관이 될까.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현 S&T중공업 회장)이 5대 그룹 빅딜 발언 파문으로 물러나자 정통부 안팎에서 후임 장관 하마평이 무성했다. 전·현직 고위 관료와 산하 기관장이 자천 타천으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1998년 12월 21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전문경영인인 남궁석 삼성SDS 사장(작고,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의장, 국회 사무총장 역임)을 새 정통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오전 11시 청와대에서 남궁석 신임 정통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줬다.

김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통부는 21세기 국운을 좌우할 중요한 부서”라면서 “빨리 업무를 파악해 삼성을 일으켜 세웠듯이 이 나라를 정보통신 강국으로 일으켜 세워 달라”고 당부했다.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현 국회의원)은 “남궁 장관은 정보통신 전문가에 경영 마인드를 갖춘 전문경영인으로 조직 장악력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아 발탁했다”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박 대변인은 또 “김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발탁한 배순훈 전 장관의 퇴임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대통령은 이에 앞서 김종필 국무총리(자민련 총재 역임)와 정통부 장관 인선을 협의했다.

남궁 장관은 이른바 어쩌다 장관이 된 `어장`에 속했다. 그는 관직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그를 장관으로 선택했다. 전직 S 차관은 정권 교체기나 개각이 있을 때마다 무려 16번이나 장관 물망에 오르내렸지만 장관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남궁 장관은 일요일인 20일 오후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입각 사실을 통보받았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모처럼 포근한 하루였다. 남궁 장관은 이날 삼성 사장단과 서울 근교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당시는 휴대폰이 없었다. 김 실장이 남궁 사장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김 실장은 할 수 없이 안병엽 정통부 차관(정통부 장관, 17대 국회의원 역임, 현 KAIST 초빙교수)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안병엽 전 차관의 증언.

“일요일인데 김 실장이 `남궁 사장에게 급히 연락할 일이 있는데 연결이 안 된다`며 `빨리 찾아 연락을 해 달라`는 겁니다. 그 무렵 후임 장관 하마평이 나돌 때였습니다. 나름 장관 인사 때문이라는 감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급히 여기 저기 수소문해 본 결과 남궁 사장은 골프장에서 `굿샷`을 외치고 있더군요.”

김 실장은 일요일이어서 서울 약수교회에서 예배를 봤다. 그는 독실한 신자로 36세에 이 교회 장로가 됐다고 한다.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된 후 대통령이 전화를 해도 예배 중에는 받지 않아 화제가 됐다. 그만큼 김 실장은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다. 당시 김 실장은 명실상부한 청와대 권력서열 2인자였다.

김 실장과 남궁 사장은 그날 오후 2시 서울 하얏트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김 실장이 약속 시간에 커피숍으로 나갔으나 남궁 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곧 오겠지 하며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김 실장의 말.

“약속을 해놓고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사고라도 났나 해서 걱정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어요.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을 해야 하잖아요. 알고 보니 그 시각에 그는 서울 롯데호텔 커피숍에 가 있었어요. 제가 약속 장소를 잘못 이야기했더군요.”

두 사람이 마주앉자 긴장한 남궁 사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왜 저를 급히 보자고 하셨습니까.”

“새 정부에서 일을 해볼 생각이 없습니까.”

남궁 사장은 김 대통령과 일면식이 없었다. 정권 실세들과도 교류가 전혀 없었다. 그런 만큼 입각 제의는 의외였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삼성맨입니다. 이건희 회장 승낙이 없으면 정부에 가서 일할 수 없습니다.”

김 실장은 남궁 사장의 그런 면을 “아주 좋게 평가했다”고 덧붙였다.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김 실장은 즉시 이건희 회장에게 전화를 했다.

이 회장의 대답은 명료했다.

“삼성의 영광입니다. 저는 좋습니다.”

장관 인사와 관련해 국민의 정부는 자민련과 공동 지분을 갖고 있었다. 정권 초창기 각료 배분을 놓고 청와대는 고심했다.

이와 관련한 김 실장의 회고.

“경제부처는 자민련에 넘기고 비경제 부처는 국민회의에서 추천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정권 출범 초기에는 무엇보다 정국 안정이 중요합니다. 김 대통령이 장관 인사를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능력과 인품, 그리고 호감도를 평가해 결정했습니다. 당시 청와대 수석들은 자기 분야에서 신문과 방송의 하마평에 오르내린 유력 인물을 모두 스크랩했습니다. 대통령 지시사항이었습니다.”

김 실장은 “김 대통령의 생각은 상당히 앞서 있었어요. 김 대통령은 요즘 말하는 혁신과 창조경제를 하려면 대기업 CEO 출신이 적격자라고 판단하셨어요. 대우전자 회장 출신인 배 장관의 후임에 남궁석 삼성SDS 사장을 발탁한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남궁 사장의 발탁에는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재정경제부 장관, 국회의원 역임, 현 군산대 석좌교수)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강 수석의 말.

“정통부 장관 재임시절부터 그의 탁월한 능력과 업무 추진력, 정보통신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보통신 분야에 정통한 전문경영인이었어요. 조직 장악력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정통부 청사로 돌아오던 남궁 장관은 마침 정통부를 떠나던 배순훈 전 장관과 우연히 만났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하며 “축하한다” “잘 부탁한다”는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가끔 만나 정책에 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남궁 장관은 정통부 대회의실에서 산하 기관장과 공무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취임식을 갖고 업무에 들어갔다.

남궁 장관은 취임사에서 “그동안 우리는 지식정보사회 기반인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을 비롯한 통신사업 구조조정, 정보통신산업 육성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왔다”면서 “미래지향적인 기술개발과 수출 지원정책 덕분에 IT제품이 IMF 경제위기 극복의 효자노릇을 했다”고 평가했다.

남궁 장관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 21세기 정보사회를 정통부가 이끌고 가야 한다”면서 “정보통신산업의 경쟁력 강화는 국내 시장 방어라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라 국제무대 진출이라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고의 틀 위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궁 장관은 “우편과 금융 사업이 민간기업 이상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경영 혁신을 이룩해야 한다”면서 “창조적 지식 기반 사회 국가건설에 정통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남궁 장관은 취임식을 끝내고 기자실로 내려와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했다.

-장관으로서 정보통신 정책의 역점은 어디에 둘 생각인가.

▲미래 정보사회에 대비해 정부가 통신 인프라를 확실하게 구축하겠다. 국민 모두가 컴퓨터를 잘 쓸 수 있게 컴퓨터 교육도 강화할 생각이다.

-정부의 대기업 빅딜에 대한 입장은.

▲지금 우리는 대변혁 시대에 살고 있다. 특정 분야는 정부가 개입하고 거들어야 제대로 변화할 수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나도 모른다. 시간을 달라(남궁 장관이 특정 분야 빅딜에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하자 12월 22일자 조선일보 만평은 입각선서라는 제목으로 남궁석 장관이 김 대통령에게서 임명장을 받은 후 빅딜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그렸다).

-관료조직은 텃세가 심한데.

▲나는 여러 기업에서 일했지만 운전기사도 데리고 다닌 적이 없다. 형제처럼 일하면 격의는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남궁 장관은 고난을 이기고 장관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역정은 드라마틱했고 이력도 남달랐다. 그는 정보화에 대한 열의가 대단해 정보화 전도사로 불렸다.

1938년 경기도 용인의 가난한 농부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다. 그의 향학열은 뜨거웠다. 그는 서울에서 1년간 약 배달을 하며 돈을 모아 선린상업고등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고학으로 고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한때 문학에 심취해 소설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으나 대학 2년 때 군에 입대한 후 그 꿈을 포기했다고 한다. 제대한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에 편입해 1967년 졸업했다.

이듬해 중앙일보에 입사해 탁월한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했다. TBC 기획실장을 지내고 1975년 37세의 나이에 삼성전자 기획조정실장에 발탁됐다. 그는 1982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 일리노이대와 하버드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1986년에는 현대전자산업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남궁 장관의 생존 시 증언.

“당시 삼성전자 내부에서 갈등이 있어 떠났는데 이건희 회장에게 이야기했더니 양해를 해줬어요. 1991년 한국통신 하이텔 사장으로 일하다 1993년에 이건희 회장이 다시 불러 삼성SDS에서 일하게 됐어요. 장관 임명 후 이건희 회장을 만났는데 `그룹에서 필요한 사람이지만 나라에서 부르니 붙잡을 수 없었다. 삼성은 이제 잊어버려라`고 하시더군요.”

남궁 장관은 현대와 삼성 양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PCS사업자 선정 때 삼성과 현대가 함께 손을 잡고 `에버넷`이란 컨소시엄을 구성했으나 사업권 획득에는 실패했다.

남궁 장관은 취임하자 `희망을 쏘아 올리는 광화문의 분수대가 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직접 만들어 디지털강국을 향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