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큼이나 정부가 벤처 진작에 적극적이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나라는 드물 것이다. 특히나 창조경제를 강조하는 현 정부 들어서는 정책·제도·자금 등 여러 면에서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그 중에서도 자금지원 측면에서 정부는 많은 재원을 할당해 벤처 펀드를 만드는가 하면, 대형 금융기관을 통해 지원을 독려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국내 벤처캐피털(VC)의 활동 무대도 커졌다. 투자 형태도 다양해졌고, 조 단위 이상의 펀드를 운용하는 VC도 생겨나고 있다. 이들 VC의 말을 빌리자면 한결같이 잘하고 있다. 그런데 벤처들의 푸념은 다르다.
일반 자금운용사라면 돈을 쉽고 안전하게 벌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벤처 투자를 꺼리고 담보에 집착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소위 VC라고 불리는 창업투자사까지도 이런 속성이라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없다. 정부 벤처자금을 운용하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 벤처자금의 상당 부분은 정부로부터 나온다. 정부는 한국벤처투자나 정책금융공사 등에서 정책자금을 마련하고, 운용을 위해 자금운용 주체를 선정하고, 이들을 통해 벤처에 투자한다. 그런데 자금운용 주체를 선정하는 기준에서 수익률과 안정성은 중요하게 고려하면서도 벤처 투자로 성과를 얼마나 거두었는지는 뒷전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자금운용 주체는 무늬만 VC일 뿐 실제로는 안전 자산에 투자해 적당 수익을 챙기는 자금운용사에 가깝다.
벤처가 투자를 받기 위해 VC를 찾아가면 그들의 대응은 한결 같다. 기술이 얼마나 뛰어나고 비즈니스 모델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뒷전이고 안전성이 먼저다. 그래서 매출 계약을 맺은 후 다시 오라고 하거나 다른 VC로부터 투자를 유치한 다음에 오라는 식으로 응대한다. 벤처를 키울 수 있는 투자를 논하기보다는 투자 보장을 먼저 이야기한다. 그런 투자 보장이 확실한 벤처라면 VC가 아닌 은행에서 융자를 받았을 것이다.
VC가 벤처 투자를 하는 경우에도 초기 벤처에 투자하는 사례는 매우 제한적이다. 대부분 투자가 후기 벤처, 특히 상장 직전의 벤처에 몰려있다. 투자 방식도 전환상환우선주 투자가 다반사다. 이 방식을 통해 VC는 투자한 벤처가 상장(기업공개)되면 상장 직전에 보통주로 전환해 높은 수익을 챙기거나, 상장이 어려우면 투자 원금에 이자를 붙여 상환을 유도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벤처와 함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투자 방식이 아닌 뒷전에서 주판알만 튕기는 지극히 계산적 투자 방식이다. 어떤 VC는 한술 더 떠 정부 벤처자금으로 벤처와는 거리가 먼 기업 구조조정이나 일반기업 인수에 더 눈독을 들인다. 이러려면 `벤처캐피털`이란 이름에서 이미 의미가 퇴색해버린 `벤처`라는 두 글자를 빼는 편이 낫다.
이렇듯 VC는 본래의 창업투자사가 아닌 자금운용사로 그 성격이 변질되고 있다. 이런 폐해를 막으려면 VC를 평가할 때 단순 투자수익률 뿐만 아니라 벤처 투자로 얼마나 수익을 냈는지를 평가하는 방안을 함께 강구해야 한다. VC의 투자수익률을 산정할 때 투자 성격에 따라 가중치를 달리하는 방법이 있다. 가중치를 현행처럼 일률적으로 둘 것이 아니라 자본이득에 비례한 가중치를 적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보장된 투자를 쫓는 VC보다는 벤처 투자를 하는 VC가 눈에 띨 것이다.
VC의 또 다른 문제는 벤처 투자전문가 중에서도 기술적 배경을 가진 이의 수가 현저히 줄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벤처 투자전문가의 상당수가 기술적 배경을 가졌다. 그러던 것이 VC가 지금처럼 창업투자사가 아닌 자금운용사로 변질되면서 기술적 배경을 가진 이들은 사라졌고, 재무적 배경을 가진 이들로만 넘쳐난다. 그러니 창업투자가 아닌 재무투자를 선호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서울대 공과대학 전기·정보공학부 초빙교수 dwight@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