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사회초년생에게
제가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한 것 같지만, 정식 직원으로 입사한 지 6년 남짓 됐습니다. 이제 겨우 신입직원 티는 면했죠. 그래도 작년부터 대학원 학생들과 연구 논문 지도를 하게 됐습니다. 과학기술대연합대학원(UST) 학생에게 강의도 하고, 새로 우리팀에 들어온 신입 직원도 몇 명 생기는 정도입니다.
![[여성과학기술인 열전! 멘토링 레터]"백조의 두 발이 쉼 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https://img.etnews.com/photonews/1307/458952_20130726184633_886_0001.jpg)
처음 입사해서 연구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신입직원 인사를 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연구소에서 오래 일하신 꽤 연배가 높으신 박사님 한분이 신입직원 9명 정도를 쭉 일렬로 세웠습니다. 덕담이라고 해주신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박혀서 생생하게 잊히지 않습니다. 얘기를 요약하자면 너희들이 지금은 모든 게 처음이라 이것저것 의욕적으로 일하고 싶겠지만, 처음 3년은 쥐 죽은 듯이 지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마치 갓 시집 온 며느리처럼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으로 지내야 회사 생활이 편할 거라는 것입니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죠.
너무나 해맑고 싹싹하게 인사를 드리고자 방에 찾아온 신입직원을 앞에서 하신 말씀이 처음에는 참 황당하고 어이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좀 겪어보니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겠더군요.
우리 사회에서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젊은 애송이가 하는 말은 일단 좀 어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아마 유교 문화권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동북아 중화권을 지배하는 유교적인 분위기가 한국 사회 곳곳을 역시나 지배하고 있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솔직하게 의사 표현을 하라고 겉으로는 말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소신 있게 거침없이 말하는 신입직원은 밉상으로 찍힐 수 있습니다.
막내는 막내답게 좀 어수룩하게 보이는 게 회사생활에는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신입직원이라는 위치가 모든 일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기 때문에 매사에 조심스럽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갖고 말을 하기도, 힘 있게 일을 추진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실수를 좀 해도 귀엽게(?) 봐주는 경향도 있죠.
저는 박사 후 과정을 했던 곳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케이스라서 정규직으로서 누리는 혜택에 처음에는 “와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급여와 복지혜택 등 처우가 확실히 달라지니까 말이죠. 정규직이 된 직후에는 아마도 좀 안일해진 것처럼 보인 모양입니다. 그룹의 다른 박사님으로부터 받는 월급 액수만큼 과연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일해야 한다는 뼈 아픈 이야기도 듣게 됐죠. 늘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만 왔으니 잠깐 템포를 늦춰서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게으른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죠.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연구를 시작하려는데,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다니… 또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연구도 하고 프로젝트도 하고 논문도 써야 했습니다. 게다가 아이도 돌봐야 했습니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딸, 좋은 며느리, 게다가 좋은 과학자까지… 주어진 역할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맘 놓고 쉴 수나 있었을까요. 여성으로서, 과학기술자로서, 세 아이 엄마로서 정말이지 치열하게 살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당당해 보이고 자신만만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 이면에는 마치 수면 아래 백조의 두 발이 쉼 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부단한 노력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어느 정도 삶에 요령이 생겨서 그나마 좀 정신을 차렸지만 입사 초기 몇 년은 회사 일에, 집안 일에,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직장 여성이 아이가 너무 어릴 때는 육아 휴직을 하면서 집에서 좀 쉬기도 하는데 연구직은 쉽지 않습니다. 공백이 있었던 기간만큼 다시 연구에 복귀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두 배, 세 배나 걸리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연구를 아예 접어버리는 여성들을 많이 보기도 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과학기술자에게는 가혹한 현실입니다. 저는 아이 셋 중에 둘을 연구소에 입사한 이후에 낳았습니다. 법정 출산휴가는 아이를 낳기 전후 모두 해서 90일, 석 달입니다. 그래서 연구소에 입사한 이후로 법정으로 보장된 출산휴가 기간인 180일, 여섯 달만 쉬고는 바로 일에 복귀했습니다. 출산휴가로 집에서 쉬는 동안에도 최근 연구 경향을 따라가기 위해서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국외파견 나가서 몇 달씩 있다가 돌아오는 사람처럼 일하다 돌아온다는 기분으로 집에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어야, 복귀한 후에 일에 적응하는 시간이 훨씬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From. 황정아 한국천문연구원 창의선도과학본부 선임연구원
제공:WISET 한국과학기술인지원센터 여성과학기술인 생애주기별 지원 전문기관(www.wise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