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가 30일 `방송프로그램 제작, 방송 출연 표준계약서` 제정안을 발표하자 독립제작사 관계자들은 환영보다 우려 섞인 전망을 더 많이 내놓았다. 표준계약서가 불공정한 방송시장의 갑을관계를 풀 첫 단초를 제공했지만, 방송사가 절대 유리한 시장 구조가 개편되지 않는 이상 본질적인 변화는 힘들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방송사는 외주제작사에 절대적인 `슈퍼갑`이다. 방송사는 외주제작사를 선택하는 것부터 편성, 제작과정에 모두 간여한다. 지상파 방송사에 방영돼야 PPL 간접광고나 해외 판매 등 판로개척이 가능해져 외주제작사는 방송사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다.
외주제작사는 많아졌지만 이를 방영할 지상파 방송파 수는 그대로여서 `슈퍼갑`의 위치가 공고해지고 있다. 2012년 기준 문화체육관광부에 신고된 독립제작사는 896개이고, 이 중 드라마제작사는 156개다. 방송사는 `편성권`을 쥐고 제작사 간 치열한 경쟁을 더욱 부추긴다.
드라마제작사협회 관계자는 “편성을 할 때 프로그램 기획안을 보고 거기에 맞는 캐스팅을 하는 것이 순서인데, 지금 방송사는 기획안을 먼저 보지도 않는다”며 “작가가 누구인지를 가장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출연진을 본다. 방송사 입맛에 맞는 사람을 데려와야 그 이후에 기획안을 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고액의 출연료와 작가료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방송사는 강력한 편성권을 바탕으로 미지급 우려가 높은 드라마도 강행한다. 2010년에 이수경, 김상경이 주연을 맡은 `국가가 부른다`를 두고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하 한연노)은 `출연료 미지급 우려가 있다`고 반대를 표명했다. 하지만 KBS는 자사 출신 대표가 만든 JH프로덕션의 방영을 결정했다. JH프로덕션은 신생 제작사이면서 재정도 넉넉지 않았고 결국 드라마는 1회 방영 후부터 출연료가 미지급됐다. `프레지던트`라는 KBS 수목드라마도 재정난이 심각한 필림이지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맡았다. 이를 두고 한연노가 지적하자 당시 방송사는 KBS미디어가 제작에 참여하고, 5억원의 보증보험에 가입돼 있다고 둘러댔으나 보증보험 가입 사실은 거짓이었다.
한연노 관계자는 “방송사들은 우리에게 `방송사 사장에게 가서 직접 제작비를 받으라`고 하기도 한다”며 “현재 31억원 이상이 미지급됐고, 방송사가 이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웬만한 지상파 드라마는 한편 제작에 7억~8억원이 투입된다. 하지만 광고가 완전히 판매(완판)돼어도 3~4억원에 불과하다. 광고 등이 안 붙고 수출이 부진하면 배우 출연료, 스텝 비용 미지급 사태 등이 발생한다. 이런 구조에서 최악의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김종학 PD의 자살이라는 것이 제작사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외주사들의 난립도 문제다. 송영웅 한국방송실연자협회 사무처장은 “가장 근원적 문제는 불투명한 방송사 편성기준과 과다하게 많은 외주제작사에서 생긴다”고 지적했다. 외주제작 시장에 제작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외주제작사들의 난립과 한탕주의가 만연해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뜻이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는 “1년에 한 편도 제작하지 못하는 나머지 122개 제작사는 대부분 신생”이라며 “이들은 방송사 편성을 받기 위해 드라마제작 시장을 교란시키면서 고액의 출연료와 고액의 작가료를 지급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과거 공정거래위원회가 만든 `방송산업분야 하도급거래 표준계약서`는 방송업계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시장에서 활용되지 않고 있다.
문화부 역시 2010년 4월 `외주제도개선협의회`를 구성하고 표준계약서 제정 논의를 시작했다. 그 결과물로 30일 표준계약서를 발표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문화부는 출연료 미지급 방지를 위해 △제작사가 출연료 등의 지급보증보험증권을 제출하거나 △출연료 미지급 시 방송사가 제작비 지급을 정지할 수 있도록 했다. 송영웅 한국방송실연자협회 사무처장은 “이행보험이 아닌 지급보험임에도 그나마 협약에서 이뤄진 것이 `5억원`”이라며 “여기에 출연료 뿐 아니라 작가와 스태프 임금까지 모두 지원해야 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방송협회는 “지금보다 한발 더 진일보한 계약서가 나오긴 했지만 외주제작 시장의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들쑥날쑥 표준 계약서가 없던 상황에서 나온 것은 환영하지만 강제 사항이 아닌 권고 가이드라인이다 보니 활용도가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문화부 관계자는 “방송 콘텐츠 유통 활성화를 위해 표준 계약서를 만들었다”며 “받아들이는 것은 당사자의 문제이지만 표준계약서 분쟁이 생길 때 법원에서 판단의 준거가 된다. 그래서 사실상 강제력을 갖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송혜영기자 hybrid@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