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연구원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조건

[ET칼럼]연구원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조건

“제가 실장 시절만 해도 체신부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을 정도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당시에 중요한 연구도 많이 했죠.”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30년 넘게 연구자로 근무한 A씨는 당시를 설명했다. 우리나라 통신 발전의 초석이 된 핵심 기술을 연구하면서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언젠가부터 연구과제중심제도(PBS)가 도입되면서 연구원이 해야 할 역할이 늘었다. 파워포인트를 자유자재로 쓰는 것은 기본이다. 연구 과제를 수주하기 위한 설명을 자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파워포인트 실력이 늘었다. 연구과제가 마무리될 시점에는 영수증 처리로 정신없다. 본업인 연구보다는 연구 프로젝트를 따고 정산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예산철이나 연구프로젝트 공고가 뜨면 연구실을 비우기 일쑤다. 담당 공무원을 만나려고 서울로 과천으로 출장 다니기 바쁘다. 그렇다고 예산규모가 큰 것도 아니다. 인건비를 제외하고 나면 연구에 투자할 부분은 많지 않다. 과제를 얼마나 많이 따오는지에 연구기관의 위상이 갈리기도 한다. 박리다매식 과제 수주의 악순환이다. 연구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과제를 위한 과제를 수주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일회성 연구용역이 대부분이다 보니 중장기 대형 연구과제는 꿈도 못 꾼다. 연구 품질과 연구기관 위상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예산 따는 데 쓰는 시간과 연구개발(R&D)하는 데 쓰는 시간을 분석해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은 예비후보 시절부터 연구원이 편하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틈날 때마다 과학기술과 R&D에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연구원이 연구현장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들어 연구원을 배려하는 정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2일엔 국가과학기술심의회가 `연구개발 재도전 기회제공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심의·확정했다. 국가 R&D 사업에서 실패하더라도 성실하게 수행한 사실이 인정되면 연구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다시 한 번 도전할 기회를 제공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앞서 범부처 공통 연구비 관리 표준 매뉴얼(안)을 마련해 연구비 관리기준을 연구자 중심으로 개선하기로 했다. 연구현장의 부담이 큰 연구비 관리 분야에 범부처 네거티브 기준을 확산해 연구자가 연구에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의지다. 정부 출연연 PBS 개선의지도 보였다. 소규모 과제 중심의 출연연 지원에서 기관 특성에 맞춘 중장기 고유 임무에 출연금 비중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연구원을 배려하는 정책은 그동안에도 없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몇몇 미꾸라지가 개울물을 흐렸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연구현장이 규제를 자초했다. 연구실 부정이 일어나고 모럴헤저드에 빠지는 연구원이 늘어나면서 규제가 강화됐다. 국민 혈세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는 정부는 연구실 비리를 예방하고 연구성과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기술에 대한 박 대통령의 애정이 남다르다. 대학시절 이공계 분야를 전공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학기술은 누가 뭐래도 창조경제의 원천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R&D 투자는 반드시 필요하고 그 핵심에 연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계와 연구원에 거는 기대가 큰 이유다.

연구원이 겪는 애로사항도 하나하나 해결되고 있다. 연구원이라면 누구나 연구에 몰입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어느 정부 못지않게 연구원 처우에 관심이 높다. 하지만 자율성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법과 상식의 테두리 속에서 자유롭게 연구하되 모럴헤저드에 빠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모처럼 형성되기 시작한 연구현장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주문정 논설위원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