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콘텐츠산업 육성 의지에 구멍이 생겼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야심차게 추진한 상상콘텐츠기금 조성, 콘텐츠공제조합 설립, 콘텐츠코리아랩 설립 등이 당초 기대했던 국고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추진동력을 잃었다. 콘텐츠공제조합은 이달 출범하지만 제대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어정쩡한 출발이 불가피하다. 상상콘텐츠기금은 국회에 관련 법안이 멈춰 서 있다. 또 미래 창작자를 키우기 위한 콘텐츠코리아랩은 당초 200억원 예산을 기대했지만 절반으로 깎였다. 모두 `돈 문제`부터 삐걱댄다. 정부 의지가 한풀 꺾인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박근혜정부는 `창조경제`와 함께 `문화융성`을 국정기조로 내걸었다.
이를 위해 5대 킬러 콘텐츠 산업 육성과 영세 콘텐츠사업자를 위한 추진 정책을 세웠다. 콘텐츠 산업이 하드웨어 산업과 달리 창의성과 아이디어에 기반한 지식산업으로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를 이끌 견인차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 업무 계획에 상상콘텐츠 기금 조성을 통한 문화자원 기반 형성, 중소 콘텐츠 기업과 영세사업자를 위한 모태펀드 투자 확대와 콘텐츠공제조합 설립, 콘텐츠코리아랩 설치 등을 담았다.
하지만 이들 계획은 겉으로는 예정대로 진행 중이지만 모두 알맹이가 빠졌다. 당초 기대했던 정부의 지원이 사라지거나 국고지원이 `언발에 오줌누기`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또 기존보다 후퇴한 정책도 곳곳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콘텐츠 기업 살길은 민간이 알아서
대표적인 사업이 콘텐츠공제조합 설립이다.
콘텐츠공제조합은 당초 영세 콘텐츠 사업자들에게 자금지원을 원활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2015년까지 1000억원 운영자금을 조성해 영세 콘텐츠 기업에 이행보증과 융자를 제공함으로써 자금난 해갈에 도움을 주겠다는 계획이다.
콘텐츠산업엔 한해 매출이 10억원 미만인 곳이 10만4000여개로 전체 동종 기업의 93%를 차지할 만큼 영세하다. 더구나 콘텐츠 기업 40.8%가 자금과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이를 위해 문화부는 정부 출연을 추진했고 올해 설립 기반 자금 30억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정작 내년부터 운용에 필요한 자금은 지원되지 않는다. 나라살림의 전체적인 윤곽을 짜는 기획재정부가 특정산업 분야 기금에 국고 지원을 걸어 잠궜기 때문이다. 융자나 이행보증에 필요한 자금도 자연스럽게 민간이 짊어져야 할 판이다.
콘텐츠공제조합 설립을 추진하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운용자금 마련을 위해 금융기관과 대기업 참여를 타진 중이지만 녹록지 않다. 금융기관을 제외한 기업 참여도 저조한 상황이다. 기업의 자금난이 여전한 상황이라 선뜻 공제조합 출연에 나서지 않고 있다.
한 애니메이션업체 관계자는 “정부가 나서서 공제조합을 설립한다고 할 때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정작 내 호주머니 돈을 옮긴다는 생각에 씁쓸하다”고 말했다.
조합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 드라마제작업체 관계자는 공제조합의 주 업무가 이행보증인데 필요한 곳이 콘텐츠진흥원 추진 사업 외에는 없어 실효성이 낮은 것도 조합 출연을 꺼리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행보증보다 투자와 융자 확대가 기업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상상콘텐츠기금은 추가 논의 조차 없어
당초 7000억원 규모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한 상상콘텐츠기금도 늪에 빠진 상황이다.
상상콘텐츠기금은 장르와 장르 간, 예술과 콘텐츠 간, 개인과 기업 간 융·복합 창작활동을 지원해 상상력이 문화자원으로 활용되는 기반을 마련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이를 통해 콘텐츠와 산업전반에 활용할 문화원형 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고 다양한 융합기술을 개발하자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정작 국회와 정부가 필요 재원을 민간에서 부담금을 걷는 것으로 조율하면서 반발에 부닥쳤다. 그러면서 법률은 국회에서 계류 중이고 기재부 역시 국고지원에 난색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콘텐츠코리아랩 설립 재원도 당초 이 기금에서 출연될 예정이었다.
콘텐츠코리아랩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당초 200억원 예산 편성을 추진했지만 100억원이 반영됐다. 콘텐츠코리아랩은 아이디어가 창업으로 이어지도록 인재를 선발해 멘토링, 자금지원과 사업화 과정을 전반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갖춘 창의인재를 양성해 콘텐츠산업의 미래를 만들자는 게 목표다.
하지만 이 마저도 상황이 순탄치 않다. 좋은 아이디어와 사업 아이템을 갖췄어도 이를 뒷받침할 투자재원 마련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국고 지원은 랩 설립과 운영 자금 등에 쓰일 예정으로 정작 후속사업에는 지원이 어려울 전망이다.
◇콘텐츠 산업 육성은 헛구호(?)
콘텐츠 산업 육성 의지도 규제이슈와 맞물려 빛이 바랬다.
정부가 음악, 게임, 애니메이션, 영화, 뮤지컬 등 5대 킬러콘텐츠를 중심으로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국회와 정부 부처 곳곳에서는 게임과 미디어콘텐츠를 중독대상으로 규정하고 산업을 옥죄는 목소리가 높다.
올초 새누리당 손인춘 의원이 셧다운제 강화 법안을 발의한 데 이어 지난 4월에는 신의진 의원이 게임을 포함한 미디어콘텐츠를 4대 중독으로 규정하고 이를 중점 관리하는 법안을 내놨다.
지난 7일에는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까지 게임을 포함한 4대중독을 중점 관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에 게임중독관리센터를 세운다는 신의진 의원 법안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학계 관계자는 이에 대해 “겉으로는 콘텐츠 산업이 우리나라를 이끌 주력산업이라고 추켜세우지만 뒤돌아서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짓밟는 정책과 법안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됐다”며 “산업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한 정신적인 토양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