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라는 말이 있다. 사다리를 타고 정상에 오른 선발 주자(강대국)가 후발 주자(개발도상국)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그 사다리를 없애버리는 것을 말한다. 뒷사람은 도약의 발판이 되어줄 사다리가 사라진 상황에서 성장하려는 의지를 잃어버린다. 성장의 선순환 체계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단계마다 사다리가 온전히 이어져 있어야 한다.
사다리가 치워진 곳에서 당황하며 주저하는 뒷사람의 모습은 묘하게 우리나라 중견기업의 처지와 겹친다. 단지 중소기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제, 판로 개척, 인력 수급 등 77개 정부 지원이 끊기거나 축소된다. 대신 한층 강화된 규제가 그들을 기다린다.
그래서인지 지난 2006년부터 2011년 사이 연평균 70여개 중견기업이 인력을 줄이거나 지분구조를 변동하는 등 인위적 방식으로 중소기업으로 복귀를 택했다. 독일과 일본의 중간 규모 기업군 비중이 각각 1.8%, 1.6%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0.04%로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창조경제 실현의 주역이어야 할 중견기업이 적극적인 연구개발(R&D)과 인수합병(M&A)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데 힘쓰기는커녕 성장을 기피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중견기업의 피터팬 증후군을 해결하기 위해 중견기업의 `성장 사다리`를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9월 경제 관계 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중견기업 성장사다리 구축방안은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나아가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른바 `희망의 사다리`를 놓아주려는 정책 과제를 담았다. 중소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걸림돌은 제거하고, 중견기업으로 연착륙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기본 취지다.
중소기업 기준을 기업의 실제 성장 여부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재설계하는 것, R&D 투자 세제지원이나 가업승계 상속공제 적용대상 확대, 수출 기업 정책금융 펀드 조성 및 해외진출 지원 등이 담겨 추진될 예정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도 중소·중견기업을 위한 성장 사다리 놓기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중견기업에 석·박사급 고급 인재들이 보다 오래 근무할 수 있도록 `희망엔지니어 적금`을 확대하고, R&D 지원 비율을 높일 방침이다.
현재 중견기업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비율은 평균 1.3%로 취약하다. 대기업(2.25%)이나 중소기업(3.36%) 수준을 밑돈다. 중견기업 전반에 걸친 R&D 투자 유인 노력이 필요하다.
얼마 전 만난 한 중소기업인은 자신의 회사에서 정년을 넘어 퇴직하는 직원들을 위해 작은 사회적 기업 설립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해 온 직원들을 따뜻하게 품으려는 생각에 감동과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기업의 가장 큰 사회적 책임이자 공헌은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대기업보다 중소·중견기업이 성장할 때 더 큰 고용 창출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내 산업을 받쳐주는 든든한 허리 역할을 해야 할 중견기업이 고질적인 취약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일자리 창출은 물론이고 중산층 복원도 요원할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중소·중견기업들이 힘차게 딛고 일어설 튼튼한 사다리를 놓아줄 때다. 여러 관계자들이 어렵게 고민해서 만들어낸 정부 정책이 그저 상징적인 대책으로만 그치지 않고 중견기업의 신발 속 돌멩이를 꺼내 주는 실질적인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는다. 이를 통해 많은 중소·중견기업이 성장의 사다리, 기회의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 `글로벌 전문기업 도약`이라는 희망을 꿈꿀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재훈 한국산업기술진흥원장 jhchung333@kia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