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 `뽀로로`가 처음 나왔을 때까지 우리나라는 내세울 만한 창작 콘텐츠가 별로 없는 애니메이션 불모지였다. 지금은 애니메이션이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로 선진국의 경계어린 시선을 받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가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미국, 일본, 영국 등 애니메이션 강국들을 보면 자국에 `건전한 산업 생태계`가 구축돼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자국에서 제작된 다수의 애니메이션들이 시장에 나와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그 중 소비자 선택을 받은 콘텐츠가 사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한다. 그렇게 축적된 자본이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한 재원으로 투입되는 선순환 구조의 환경을 갖췄다.
이 같은 생태계를 구축하려면 몇 가지 기본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기업 스스로 경쟁력 있는 콘텐츠 제작 역량을 갖춰야 한다. 시장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콘텐츠가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성과를 낼 수 없다.
둘째, 제작자들이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투자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셋째, 창작 애니메이션이 소비자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공정한 기회가 제공되고, 콘텐츠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캐릭터 수익을 위해 제작된 TV 애니메이션이라 해도 자체 콘텐츠로 수익을 창출할 수 없다면 제작자는 제작할 이유가 사라지고, 산업은 당연히 기반을 잃게 된다.
이 세 가지 조건을 전제로 보면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산업의 개선 과제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TV용 애니메이션 창작은 일본보다 무려 24년이나 뒤처진 1987년에야 시작됐다. 창작 애니메이션 제작 총량도 일본의 10%에도 못 미친다. 시작 자체가 늦은데다 창작 경험도 일천한 탓에 2000년 초반까지 한국 애니메이션 토양은 아주 황폐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창작 애니메이션은 국내외에서 눈부신 성과를 발휘하고 있다. 아직 유아용 위주의 콘텐츠라는 한계와 다양한 장르 확장이 필요하지만 확실히 애니메이션의 경쟁력은 높아졌고, 발전 가능성도 확인됐다.
투자 환경은 여전히 실망스럽다. 한국 제작자들은 열악한 산업 환경 속에 일하고 있고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크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 애니메이션은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형 산업이다.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는 미국은 투자에 대한 고위험(High Risk)을 감당할 수 있는 월트디즈니, 워너브러더스 등의 메이저 기업이 애니메이션을 주도하고 있다. 일본, 영국, 프랑스 등도 이러한 고위험 구조를 감안해 평균적으로 애니메이션 총 제작비의 40~50%를 정부 지원이나 방송사의 방송료로 분담해준다. 반면에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은 훨씬 무거운 부담을 떠안고 있다.
우리나라 방송사들이 제작자에 지불하는 방송료는 평균 제작비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정부도 애니메이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지만 제작자들이 안고 있는 과도한 부담을 덜기에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다.
다행히도 `뽀통령` 이후 폴 총리라 불리는 `로보카 폴리`와 강력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라바` `또봇` `꼬마자동차 타요` 등 애니메이션 강자가 잇따라 나왔다. 이들로 우리나라도 소비자 선택을 받은 콘텐츠는 충분히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셋째 조건도 충족됐다.
그렇다면 건강한 애니메이션 생태계를 만드는 남은 과제는 `투자 환경 개선`에 초점이 맞춰진다. 제작자의 부담을 덜고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경쟁을 통해 수익이 창출되는 구조가 된다면 분명 대한민국도 애니메이션 강국에 올라설 수 있다.
최종일 아이코닉스 대표 jichoi@iconix.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