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제조업로드를 가다]일본-날개 꺾인 일본 제조업, 이대로 추락하나

아침 8시경 도쿄역에서 무사시코스기역으로 가기 위해 도쿄 급행 전철을 탔다. 출근 시간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좌석은 많이 비어 있다. 전철을 갈아타고 일본 첨단 제조업의 상징인 다마가와 강변을 둘러보기 위해 무카이가와라역으로 향했다.

지난 1970년대부터 다마가와강을 따라 파나소닉, 후지쯔 등 글로벌 기업의 제조 시설이 들어섰다. 완제품 업체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후방 협력사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강을 따라가면 일본 경제를 이끌던 제조업 생태계를 엿볼 수 있다. 무카이가와라역은 출입구가 NEC의 첫 번째 공장 부지와 바로 연결된다. 역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규모지만 동행한 히로미 안조 도쿄오카공업(한국 TOK첨단재료 모회사) 홍보부장은 “예전보다 규모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NEC가 사업부를 하나하나 매각하고 여러 차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공장도 축소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NEC는 PC·휴대폰 사업에서 차례로 철수한 데 이어 지난 1999년에는 분사시킨 D램 메모리반도체 업체 엘피다가 경영난에 시달리다가 미국 마이크론에 매각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한산한 전철 안과 역 주변 풍경들은 제조업 중심지답지 않았다.

◇달라진 위상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일본은 지난 1990년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09%에 달했다. 정점을 찍은 일본 경제는 이후 1995년 8.86%, 2000년 7.7%로 위상이 낮아졌고, 지난 2012년에는 5.58%로 낮아졌다. 2011년에는 세계 2위 경제대국 자리를 중국에 내줬다.

부동산 과잉 투자같은 버블 경제 붕괴가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일본을 이끌던 전자·자동차 산업에서 후발 주자인 한국·중국에 시장을 잠식당한 게 가장 컸다.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 시장에서는 `갈라파고스 현상`으로 불리는 고립화 전략을 추진하면서 글로벌 시장과 동 떨어진 길을 걸었다. 도요타 대량 리콜 사태 등 안전 문제는 물론 해외 경쟁국들의 견제가 이어졌다. 엔고가 지속되면서 가격 경쟁력도 잃었다. 지난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경상수지마저 흑자 기조에서 적자로 돌아섰다.

버블 붕괴 이후 내수 소비는 위축되고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글로벌 제조 기지화를 추구한 것도 일본 제조업 몰락을 가속시켰다. 지난 1950년대부터 198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일본 자동차 산업 부품 공급망도 다변화되면서 제조업 공동화 현상이 벌어졌다. 동일본 대지진은 이를 가속화시켰다. 이 지역에 생산 거점을 두고 있던 회사들이 한꺼번에 조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제조업 공동화 심화

미국 다우케미컬은 최근 일본 에폭시 공장을 완전히 철수하는 대신 한국 여수 공장 생산량을 늘리기로 했다. 글로벌 제조기지 구조조정 과정에서 채산성이 낮은 일본 법인은 축소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일본 TOK는 지난해 인천 송도에 반도체·디스플레이용 포토레지스트 신공장을 건설했다. 일본 내에 생산 기지가 있지만 한국 고객사를 잡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일본 요코하마 인근 사가미 공장에서 한국으로 오는 시간은 세 시간 정도면 되지만 이마저도 아깝다는 것이다.

일본 스미토모화학은 한국에 잇따라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100% 자회사인 동우화인켐, 스미세이케미칼, 삼성전자와 합작사로 설립했던 SSLM 등이 예다. 미쓰비시화학은 솔브레인에 합작 투자를 추진했고, 알박 역시 한국에 생산 기지를 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일본 제조업 경쟁력 실태분석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1년 이후 일본 자동차 업체들의 해외 생산량은 지속적으로 늘었다. 2001년 668만대에 불과했지만 2010년에는 1318만1000대로 늘었다. 특히 아세안 지역에 집중됐다. 일본 자동차 기업의 자동차 생산대수 중 711만4000대(54%)가 이 지역에서 제조됐다.

더불어 자국 내 생산량은 줄었다. 지난 2007년 1159만6000대를 기록한 후 2010년에는 962만9000대로 축소됐다. 일본의 주력 산업인 전자·자동차 기업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다 보니 자국 내 제조 기업 수도 줄었다. 지난 1996년 약 37만개에서 2009년 약 24만개로 감소했다. 종업원 수 역시 지난 1990년과 비교했을 때 2009년은 80% 수준에 불과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원천 기술의 저력

산화물(옥사이드) TFT 디스플레이는 현재 최고 프리미엄 기술로 여겨지는 저온폴리실리콘(LTPS) 방식보다 생산 단가가 저렴하다. 이를 가장 먼저 상용화해 애플에 납품한 건 일본 샤프다. `이그조(IGZO)` 방식의 원천 기술 역시 일본에서 개발했다.

세계적으로 발광다이오드(LED) 패키지 업체들은 지난 몇 년간 일본 닛치아와 특허 소송으로 몸살을 앓았다. 백색 LED 관련 원천 특허를 보유한 닛치아와 줄줄이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도 마찬가지다. 화학적기계연마(CMP), 다이본딩필름(DAF) 등 한국 업체가 국산화한 소재는 어김없이 일본과 특허 분쟁이 일어난다. 소재뿐만 아니라 전체 특허등록 건수도 지난 2011년 기준 일본이 23만8300여건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다. 꿈의 신소재라 불리는 탄소섬유를 최초로 양산한 것도 일본 도레이다. 소재·공정 기술에서는 원천 기술 개발과 상용화 기술 모두 독일과 더불어 여전히 투톱을 유지하고 있다.

아베 정부 출범 이후 정부의 대폭적인 제조업 지원 정책도 변수다. 지난 2002년 구조개혁특구, 2011년 종합특구에 이어 지난해 아베노믹스 성장 전략에 국가전략특구 창설 전략이 포함됐다. 도쿄도, 오사카부시, 아이치현 등 3대 도시권을 국가전략특구로 지정해 인력·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한다는 것이다. 의료·교육 등 도시 인프라를 정비하고, 법인세율을 20%로 인하하는 등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한다. 아이치현은 항공우주산업 집중육성특구로 지정해 기술자와 미래 산업의 초석을 닦는다는 발상이다.

도쿄(일본)=오은지기자 onz@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