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까지만 해도 60여명이 근무하는 어엿한 회사를 이끌던 독립제작사 대표 B씨. 지상파TV 방송사와 계약해 외주 제작 프로그램을 주로 만들었다. 갑자기 외주계약 해지를 통보해온 방송사. 이유를 묻자 어쩔 수 없다는 PD의 말만 되풀이됐다. 일이 끊기자 직원들 월급을 주기 힘들어졌다. 현재 직원은 1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B씨는 이제 독립제작사 일은 근근히 유지하면서, 부업으로 미용기기 판매업까지 손을 댈 작정이다.
#야심차게 준비한 다큐멘터리 기획안이 지상파TV 방송사에 채택된 독립제작사 B사. 방송뿐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질 가치가 있을 것이라 보고 방송사에 영화판권 만큼은 독립적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절대 안 된다는 대답 뿐. 방송사 외에는 다큐멘터리 플랫폼이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에 B사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그 어떤 저작권도 가질 수 없다는 항목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하고 나서야 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
얼마 전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등 이른바 `눈물 시리즈` 처럼 독립제작사들이 눈물 흘리고 있다. 다 죽어버린 제작 환경에 싹(창작)은 피어나지 못하고, 전문 인력들도 떠나고 있다.
이처럼 독립제작 환경 자체가 피폐해진 직접적 원인은 방송사와 독립제작사 사이에 오랫동안 고착화된 `갑을 관계`에 있다.
불공정한 수익 배분 구조를 비롯해 △저작권 전체의 방송사 귀속 △턱없이 낮은 제작 지원비 △(방송사의) 거래상 지위 남용 △차별적 계약 관계 등 다양한 문제가 몇 년 동안 계속 쌓여오면서 토양 자체를 썩게 만들고 있다. 방송사 플랫폼 외에는 영상을 틀 수 있는 있는 플랫폼이 없기 때문에 이 같은 관계가 싫어도 독립제작사는 여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독립제작사의 사실상 `최저생계비`인 제작비는 물가, 인건비 상승에 아랑곳 없이 요지부동인 상황이다. 독립제작사들에 따르면 방송사가 독립제작사에 주는 제작비는 10년이 넘도록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독립제작업계 관계자는 “10년이 지나면서 물가는 상승했는데 제작비는 그대로”라며 “영상을 찍어도 틀어줄 플랫폼이 없으니 방송사들의 횡포에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IMF와 2008년 경제위기 때 방송사들이 제작비를 일괄적으로 삭감했지만 교양 프로그램은 제작비 복구가 안 되고 있다”며 “독립제작사들이 주로 찍는 프로그램은 제작 단가가 정해져 있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노 교수는 방송사가 독립제작사에 외주를 주는 프로그램이 대부분 인력비가 높다고 설명했다. 그는 “상당한 인력 투입이 필요한 프로그램 비중이 높아 인건비가 부담스러운 상황인데도 방송사 자체 제작과 외주 제작은 제작비 산정 방식부터가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독립제작사가 찍은 영상에 대한 저작권을 갖지 못하는 점도 성장이 어려운 요인이다. 부가수익 창출의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있는 것과 같은 셈이다. 제작비도 적게 받고 저작권도 갖지 못하니 수익이 날 수 있는 방안이 없다.
독립PD협회의 `방송외주제작 방송사의 불공정 실태`에 대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방송외주제작 저작물의 저작권 91.7%를 공중파 방송사가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외주제작사가 소유하는 경우는 6.3%에 그쳤다. 자신들이 기획하고 찍은 영상에 대한 저작권을 가질 수 없는 구조다.
한 독립제작사 대표는 “방송사와 계약서를 쓸 때 저작권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항목에 동의해야 계약이 성립된다”며 “독립제작사들이 저작권을 갖는 것은 원천 봉쇄돼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방송사 관계자는 “사실상 저작권을 나눠주면 방송사의 힘이 약해진다”며 “저작권을 독립제작사와 나눠 갖는다면 결국 방송사는 플랫폼 역할 밖에 할 수가 없다”고 고백했다.
독립제작사는 재방송료도 받지 못한다. 작품에 참여한 작가, 배우들도 재방송료를 받지만 독립제작사는 제외된다. 독립PD협회 조사 결과, 방송사가 내보낸 프로그램 중 97.9%는 외주제작사에 재방송료를 지불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방송에 참여한 작가, 배우들도 프로그램이 재방송되면 돈을 받는데 영상을 오롯이 만든 우리는 왜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지원준 독립PD협회 운영위원은 “방송사 권력이 너무 무한 남용되고 있다”며 “다른 것은 바라지도 않고 독립제작사에 대한 최저임금만이라도 보장해 달라”고 호소했다.
전지연기자 now2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