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동계 올림픽이 한창이다.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 이상화,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은 박승희 선수가 아름답다. 여섯 번째 올림픽 무대에 오른 이규혁 선수와 모굴 스키, 컬링 대표팀 도전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김연아 선수의 올림픽 2연패 도전도 기다려진다. 또 한 명의 선수에 눈길이 쏠렸다. 귀화해 러시아에 첫 쇼트트랙 메달을, 그것도 금메달을 안겨준 안현수, 아니 빅토르 안 선수다.
놀랍다. 많은 사람이 이 러시아 대표선수를 응원했다. 그의 귀화로 새삼 드러난 빙상계 고질적 병폐에 넌더리가 난 탓이다. 파벌에 승부조작, 뇌물, 폭행, 성추행까지 적나라하다. 이런 부정과 비리가 빙상계에만 있을까. 체육계,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했다.
이런 부조리를 없애보자는 염원이 들불처럼 번진 적이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나온 ‘히딩크 신드롬’이다. 체육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가 오로지 실력만으로 평가하자는 공정 경쟁을 화두로 삼았다. 어느 정도 효과도 봤다. 하지만 빙상계에서 확인했듯이 아직 멀었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언급하면서 체육계 부조리 개혁이 활발할 것이다. 대통령이 ‘비정상의 정상화’를 선언한 마당이라 사회 전체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방법이 문제다. 어떻게 해야 효과적일까. 분야 별로 ‘제2의 안현수’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런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아마도 부조리가 심각할 것이다. 오죽했으면 국적까지 버리려 할까.
산업계라면 소프트웨어와 게임·콘텐츠 분야를 꼽을 수 있겠다. 한국을 떠날까 한번쯤 생각해본 종사자가 많이 몰렸다. 특히 개발자가 그렇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박봉과 야근에 시달린다. 공공 시장에서도 제값을 받지 못하는 풍토 탓이다. 영어 회화만 능통하다면 억대 연봉과 사회적 인정까지 받는 미국과 같은 곳에서 한번 일하고 싶다. 게임 개발자는 한국을 떠날 이유 하나를 더할 수 있다. 게임을 마치 마약·도박으로 여기는 나라다. 자신을 마약장수인양 취급하는데 배우자, 자녀 볼 낯이 없다.
최근 두 애니메이션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다. 미국 디즈니가 만든 ‘겨울 왕국’과 한·캐나다·미국 합작 ‘넛잡’이다. 둘 다 한국인 스텝이 많이 참여했다. 우리 애니메이션산업인의 실력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한국인 스텝이 우리나라에서만 일했다면 지금 과연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방송사에 팔아도 순 제작비의 10%도 받지 못하는 나라다. 미국, 일본처럼 시장이 크지 않으니 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최소한 인건비를 건질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나. 우리 애니메이션산업인 삶이 최저생계비 선을 왔다 갔다 한다. 이들 앞에 ‘넛잡이야말로 창조경제 모델’이라는 장밋빛 구호는 너무 먼 나라 얘기다.
거의 매달, 그것도 피 말리는 단가 인하 협상을 벌이는 대기업 2·3차 협력사 사장도 한국을 떠나고 싶다. 협력을 제안했는데 사업 아이디어만 빼앗긴 벤처기업 사장은 더욱 그렇다. 대기업 경영자라고 예외는 아니다. 각종 정부 규제와 경직된 노사관계, 반기업 정서에 시달린다. 심정적이나마 본사만이라도 외국으로 옮기고 싶다. 국내 간판 게임회사 넥슨이 2년 전 일본에 상장한 것이 단지 그곳 시장이 한국보다 컸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여행이라면 모를까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국적을 버린 채 살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 봤자 더 큰 고생이 기다린다. 그래도 떠나고 싶다. 숱한 문제 지적에도 개선은 요원하다. 하소연을 듣는 이조차 없다. 개인이 넘기엔 너무 높은 벽이 수두룩하다. 질식할 것 같아 고작 속으로 내지른 외침이 ‘빅토르 안’ 응원일 뿐이다.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