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2008년 11월 5일 새벽. 남중수 KT 사장(현 대림대 총장)은 검찰 출두를 앞두고 참담한 심정을 담은 서른 번째 ‘원더메모’를 직원들에게 보냈다.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을 연상케 하는 사퇴의 변이었다.

남 사장은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드려 사실관계의 진위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에머슨의 ‘성공이란 무엇인가’란 시를 보내면서 글을 끝냈다.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른 2013년 11월 3일.
이석채 KT 회장(정보통신부 장관 역임)은 사임을 앞두고 긴 이메일을 직원들에게 보냈다.
이 회장은 “아이를 위해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솔로몬 왕 앞의 어머니 심정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 모든 것이 다 제가 부덕했던 탓”이라며 “그간의 일들로 여러분이 공들여 만든 회사의 이미지가 피해를 받은 점 가슴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가슴 아픈 기억이지만 꼭 닮은 꼴이다. KT 수장이었던 남중수 사장과 이석채 회장의 퇴진 과정은 동색(同色)이었다. 우선 정권이 교체되자 불명예 퇴진했다. 연임에 성공했지만 두 사람에겐 그 일이 불행의 씨앗이 됐다. 비리혐의로 둘 다 검찰수사를 받았다. 이임식도 없이 이메일로 이임사를 대신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노무현정부 집권 3년차에 접어든 2005년 6월 18일.
민영 KT 2기 사장추천위원회(이하 사추위)는 사장에 남중수 KTF 사장을 추천했다.
사추위 위원은 윤정로 KAIST 교수(KT 이사회 의장 역임, 현 한국사회학회장), 스튜어트 솔로몬 메트라이프코리아 사장, 김건식 서울대 교수(현 정보공개위원장), 김주영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 이계철 전 KT 사장(방송통신위원장 역임) 등 5명으로 구성했다.
사추위는 “남 사장이 그동안 KTF 사장으로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한 점을 높이 평가해 KT 사장으로 추천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그해 8월 19일.
남중수 사장은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우면동 KT 신사업기획본부 2층 강당에서 열린 임시주총에서 민영 2기 사장으로 선임됐다.
남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매사추세츠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광수 체신부 장관(청와대 비서실장 역임) 비서관을 거쳐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입사 후 충북본부장과 사업협력실장, IMT2000사업추진본부장, 재무실장을 역임했다.
정통부 고위관계자 H씨는 KT 민영 2기 사장을 선임할 때까지는 “청와대나 정통부 등 외부에서 사장 선임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남 사장은 현장을 중시했다. 그는 특유의 추진력과 근면성을 토대로 고객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는 ‘원더(wonder)경영’을 선포하고 고객중심 경영을 했다. 그는 새벽 5시면 출근해 할 일을 검토하고 직원들에게 일일이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Great(위대한) KT’를 만들기 위한 고객가치 혁신을 추진했고 2007년 8월에는 종합 미디어엔터테인먼트그룹으로 KT의 변신을 선언했다.
KT는 2006년 3월 10일 제24회 정기주주총회에서 KT 사장 공모제를 없애고 사외이사 전원이 사추위에 참여해 사장후보를 결정할 수 있게 정관을 개정했다.
이와 관련한 윤정로 교수의 증언.
“사장 공모제는 후보자 검증 시일이 촉박해 부실 우려가 있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았어요. 2005년 KT 민영화를 위한 지배구조 전반을 개선하면서 이런 의무조항을 삭제했습니다. 이때 사외이사는 한 번만 연임하며 임기가 끝난 이사도 다시 검증토록 했습니다. 당시 외국의 사례를 조사해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KT는 2007년 11월 13일 이사회를 열고 사장 선임을 위한 사추위를 구성했다.
사추위원은 윤정로 KAIST 교수, 스튜어트 솔로몬 메트라이프 사장, 김도한 세종대 교수, 김건식 서울대 법대 교수, 곽태선 세이에스코리아자산운용 대표(현 베어링자산운용 대표), 윤종규 김&장 고문, 이창엽 한국코카콜라 사장의 사외이사 7명과 이해욱 전 사장(체신부 차관 역임),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전 KAIST 이사장) 총 9명이었다.
사추위는 12월 3일 민영화 3기 사장으로 남중수 사장을 단독 후보로 추천했다.
이해욱 사추위원은 “남 사장은 업무능력이나 전문성 등이 뛰어나고 투명경영과 고객가치 혁신 등을 실현하는 데 적임자여서 선임과정에서 잡음이나 거부감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명박정부가 출범한 지 4일 후인 2008년 2월 29일.
KT는 서울 서초구 우면동 KT연구센터에서 열린 정기주주총회에서 남 사장을 임기 3년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선임했다. 남 사장에게는 연임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남 사장은 새 정부 출범 8개월여 만인 10월 16일 납품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당시 남 사장 사퇴를 위한 표적수사란 뒷말이 나돌았다. 그는 11월 5일 불명예 퇴진했다.
KT 이사회는 서둘러 11월 6일 사추위를 구성했다.
사추위원은 윤정로 KAIST 교수, 김도환 세종대 교수, 김건식 서울대 교수, 윤종규 김&장 고문, 이창엽 한국코카콜라 사장, 고정석 일신창업투자 사장, 오규택 한국채권연구원장(현 중앙대 교수) 사외이사 7명과 이준 전 KT 사장(국방부 장관 역임), 김인규 한국디지털미디어협회장(KBS 사장 역임, 현 한국전쟁기념재단 이사장) 9명이었다.
사추위는 12월 9일 이석채 전 정통부 장관을 사장 후보로 결정했다. 다소 의외였다. 그동안 KT 사장은 차관이 갔던 자리였다.
이와 관련한 Y 전 장관의 증언.
“후임 사장을 놓고 하마평이 나돌 무렵, 전직 장차관이 모인 자리에서 KT 사장에 정통부 출신 인사를 추천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정정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현 울산공업학원 이사장)에게 그런 입장을 전달하기로 했어요. 이튿날 박관용 전 청와대 비서실장(국회의장 역임)이 급한 일이라고 해 만났더니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이상득 의원(국회 부의장 역임)을 통해 이석채 전 장관을 KT 사장으로 밀고 있는데 왜 방해를 하느냐. 당신도 YS 시절 장관한 사람 아니냐. 이번만은 제발 가만히 있어 달라’고 통사정을 하더군요. 당시 청와대 박병원 경제수석(현 전국은행연합회장)이 총대를 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 장관 앞에 장애물이 나타났다. 그가 KT 경쟁사인 LG텔레콤 계열사 LG전자와 SK텔레콤 계열사 SK C&C 사외이사를 지낸 게 문제가 됐다. KT의 정관에는 “회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회사 및 그와 공정거래법상 동일한 기업 집단에 속하는 회사의 임직원 또는 최근 2년 이내에 임직원이었던 자는 회사의 이사가 될 수 없다”고 명시했다. KT는 이런 내용의 정관을 삭제했다.
윤정로 교수의 계속된 증언.
“이 정관을 적용하면 KT 혁신과 비전을 실천할 능력 있는 인사를 KT 사장으로 선임할 수 없었습니다. KT가 이통사들과 적대적 관계인 시절에 넣었던 항목이어서 삭제한 것입니다.”
김유정 민주당 당시 대변인(18대 국회의원)은 “KT가 정관 개정이라는 무리수까지 두면서 이 전 장관을 내정한 과정은 정권의 낙하산을 민간기업에까지 투입하기 위한 수순”이라고 비판했다.
KT는 2009년 1월 14일 서울 우면동 KT 연구센터에서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이석채 전 장관을 사장으로 선임했다. 이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제7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했다. 지난 1981년에는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96년부터 정통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다.
KT는 2월 24일 이사회에서 사장을 회장으로 바꾸기로 하고 3월 27일 KTF 합병 주주총회에서 이를 통과시켰다.
이 회장은 처음엔 KT 혁신 전도사로 기대를 모았다. 취임 6일 만에 KTF 통합을 발표했고 3개월 만에 합병승인을 받아내 “역시 이석채”라는 찬사를 받았다. 2010년 3월 5일 노조와 무분규 임단협을 체결해 적대적 노사관계를 우호적 관계로 돌려놓았다. 아이폰을 도입해 국내 스마트 혁명을 주도하는 등 성과를 내놓았다.
이 회장은 이후 차츰 독선경영과 낙하산 인사 논란에 휘말렸다. 그는 이춘호 전 여성부 장관 후보자(현 EBS 이사장)와 대통령직인수위 팀장이었던 허증수 경북대 교수(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 역임)를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이 회장은 2010년 12월 1일 김은혜 전 청와대 대변인을 KT 전무로 임명해 낙하산 논란을 키웠다.
국회 문방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은 12월 2일 논평을 통해 “민영기업 KT가 이명박정권의 낙하산 인사 집합소로 전락했다”고 비난했다. 최민희 민주당 의원은 2013년 10월 14일 국정감사에서 “KT에 ‘정권 낙하산’ 인사가 36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낙하산 인사는 내부 갈등의 폭발음이 됐다. KT에 있던 기존 직원들은 ‘원래KT’, 이 회장 취임 후 온 사람은 ‘올래KT’라는 말이 나돌면서 조직 내 불협화음은 증폭됐다. 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매출도 하락했다.
이 회장은 박근혜정부 출범 후인 2013년 3월 16일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참여연대와 전국언론노조 등이 이 회장을 업무상 배임혐의로 그해 2월 27일과 10월 10일 두 차례 검찰에 고발하면서 위기에 몰렸다. 그해 8월 29일에는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사퇴를 종용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해 10월 22일 검찰은 이 회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고, 11월 12일 불명예 퇴진했다. 5년 전과 같은 과정이었다.
KT는 표현명 사장(현 KT렌탈 대표) 체제로 전환한 뒤 후임 회장 선임을 위해 사추위를 구성했다. 사추위원은 이현락 세종대 석좌교수(동아일보 편집인 역임)를 위원장으로 김응한 변호사, 박병원 은행연합회장, 성극제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송도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SBS 사장, 방통위 부위원장 역임), 이춘호 EBS 이사장, 차상균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와 김일영 코퍼레이트센터장(사장) 총 8명이었다.
KT는 2014년 1월 27일 오전 10시 서울시 서초구 KT 연구개발센터 대강당에서 열린 KT 임시주주총회에서 13대 회장으로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을 선임했다.
황 회장은 주총에서 “글로벌기업을 이끌어 본 경험과 국가 R&D 프로젝트를 수행한 노하우를 경영에 접목해서 대한민국의 통신 대표기업 ‘1등 KT’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올 때의 화려함보다는 떠날 때 당당함이 더 아름다운 법. 황 회장의 뒷모습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그가 만들 자화상이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