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에서 네트워크 장비를 구매할 때 특정 기업이나 제품에 유리하도록 제안요청서(RFP)를 만드는 ‘스펙 알박기’가 사라질 전망이다. 최근 일부 공공기관이 외산 장비에 유리한 RFP를 공개하면서 국산 업체 진출이 원천적으로 차단됐다는 지적에 정부가 대책을 내놓았다. (본지 3월 19일자 2면 참조)
미래창조과학부는 3억원 이상 장비 구매 시 발주규격심의 의무화가 핵심인 ‘IT 네트워크 장비 구축 운영·지침’을 전 부처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31일 밝혔다.
지식경제부 시절이던 2010년 말 도입된 이 제도는 저가 입찰, 부적격 제품 구매, 특정 업체에 유리한 규격 명시 등 장비 도입 과정에 만연한 불합리한 관행을 없애는 게 목적이다. 특히 RFP에 특정 규격을 명시하는 ‘스펙 알박기’는 국내 기업과 글로벌 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 경쟁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꼽혀 왔다.
장비 구매나 운영, 유지보수 등 사업 규모가 3억원 이상인 사업은 RFP 사전규격 공고 이후 제기되는 불만에 대해 심의위원원회를 구성해 적합성을 판단한다. 심의위원회는 학계, 연구계, 정부 등 국내외 전문가로 구성된다. 발주 기관은 위원회 판단에 따라 시정조치를 하거나 불만을 제기한 기업에 해명을 해야 한다.
지난해 3월 출범한 미래부는 지식경제부와 마찬가지로 부처 내부와 산하기관에 해당 제도를 적용해왔다. 연초부터 전 부처 확대를 목표로 의견을 조율 중이다. 대상 부처와 기관이 방대하기 때문에 간단히 협의될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특별한 이견이 없으면 이달 안에 의견수렴이 마무리된다는 게 미래부의 설명이다.
미래부는 고시가 마련되는 대로 안전행정부에 관보 고시를 요청할 방침이다. 관보에 고시되면 바로 시행된다.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기 때문에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전망이다.
미래부 관계자는 “외국 기업 제품은 해외 여러 곳에서 사용되면서 성능이 검증됐다는 점 때문에 관행적으로 외산을 선호한다”며 “경쟁에서 차별을 없애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고 전했다. 그는 고시가 시행되고 분위기가 조성되면 각 기관 담당자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공기관의 RFP 스펙 알박기는 오래전부터 바로잡아야 할 관행으로 꼽혀왔다. 2012년 한국네트워크산업협회(KANI)가 조달청 나라장터에 올라온 네트워크 장비 관련 RFP 174건을 분석한 결과 10건 중 4건에 해당하는 38% 이상에서 특정 회사에 유리한 내용이 발견됐다. 특정 스펙뿐만 아니라 특정 부품과 조건 등 다양한 불합리함이 포함됐다.
최근에는 경기지방경찰청이 특정 외산업체에 유리한 사전규격 RFP를 공지해 논란이 일었다. 해당 RFP는 정부가 공공기관 국산 장비 우선구매를 골자로 한 ‘네트워크산업 상생발전 실천방안’을 발표한 날 공개됐다.
RFP 스펙 알박기는 경쟁 기회조차 주지 않아 국산화율을 떨어뜨리는 주범 중 하나다. KANI의 ‘2013년 공공기관 ICT장비 구축운영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144개 공공기관 네트워크 장비 국산화율은 23.1%다. 국내에선 생산이 되지 않아 대체 불가능한 장비를 고려하더라도 매우 낮은 수치다.
특정 조건 언급한 공공기관 RFP 비율
자료:KANI(2012년)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