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은 지난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한 후 품질 경영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이 회장이 밝힌 “불량은 암” “1년간 회사 문을 닫더라도 불량률을 없애라” 등의 주문에 따라 삼성전자 직원들은 품질 지상주의에 올인했다.
이 회장의 경영 방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다. 바로 1995년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해머로 부수고 불에 태운 화형식이다. 휴대폰 15만대 화형식은 삼성전자 제품에 신뢰감을 불어넣고 최고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삼성전자의 휴대폰 ‘프리미엄’ 전략은 악착같기로 유명하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삼성전자의 제품 사양이나 테스트 기준은 경쟁사에 비해 높다. 스마트폰 출시 전에 낙하 검사만 수백번을 거치고 수십번의 스트레스테스트(악조건 환경에 제품을 두고 정상 작동하는지 알아보는 시험)를 통과해야만 매장에 진열될 수 있다.
지난해 ‘갤럭시노트2’ 등 스마트폰 배터리가 부풀어 오르는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대량 리콜이라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문제가 있으면 당당하게 맞서며 신뢰성을 회복하는 전통으로 프리미엄 브랜드를 지켜냈다.
그런데 최근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의 행보는 이 같은 전통을 거스르는 것 같아 의아한 생각이 든다.
지난 2월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의 ‘갤럭시S5’ 사전공개(언팩) 행사에서 최신 기능인 지문인식센서가 작동하지 않아 품질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외국 기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아예 행사기간 동안 이례적으로 일반인에게는 제품을 공개하지 않았다.
20년 전 화형식 때의 비장한 자세와 각오가 점점 약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애니콜과 갤럭시의 성공 신화는 품질문제를 공론화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품질 문제를 일컬어 “위궤양은 회복되지만 암은 진화한다. 초기에 잘라내지 않으면 3~5년 뒤에 온몸으로 전이돼 사람을 죽인다”고 강조했다. 지금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봐야 한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