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프트웨어정의네트워크(SDN) 1세대 스타트업 나임네트웍스를 이끄는 류기훈 대표는 ‘공감’이라는 주제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에 주저 없이 ‘타인의 고통’을 꼽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은 미국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인 수전 손택이 2003년에 발표했다. 그는 비판적 시각을 통해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자리 잡았다. ‘타인의 고통’에서 범람하는 현대 사회의 자극 속에서 점차 무디어진 ‘타자에 대한 고통’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공감’의 가능성을 역설한다.
류 대표는 “대부분의 사람이 ‘수단의 굶주린 소녀’라는 사진을 접한 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사진 속 삐쩍 마른 소녀는 고개를 떨구고 몸을 웅크리고 있다. 죽음을 앞둔 소녀를 독수리가 뒤에서 응시한다.
류 대표는 “수전 손택은 ‘많은 사람이 이 사진 앞에서 소녀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지만 연민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며 “그녀는 그 피사체가 ‘나나 나의 가족, 혹은 친구’라는 전제 하에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날선 화두를 던진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처럼 사진 속 피사체가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한 불쌍한 소녀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 가족인가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극과 극을 달린다. 그 감정 변화의 본질에는 ‘그 소녀의 고통에 내가 개입해 있는가’라는 물음과 성찰이 존재한다.
수전 손택은 연민이란 감정은 타인의 고통에 내가 ‘개입’해 있다는 사실을 숨겨주는 자기방어기제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연민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 고통의 원인에 연루돼 있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나 자신은 무고하다는 증명을 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류 대표는 “우리는 주위의 힘든 상황과 어려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공감 대신 값싼 연민으로만 대응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수전 손택의 주장처럼 연민이 아니라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회사는 기본적으로 공동체 집단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상황에 따라 고통 받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오로지 그의 것만이 아닌, 나와 우리가 깊숙하게 개입해야 하는 성질의 문제로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임네트웍스는 SDN 확산에 발맞춰 지난해 9월 설립됐다. 스타트업 기업답게 모든 직원이 숨 가쁘게 달리는 와중에서도 류 대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중시한다. 이제 막 기업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단계인 만큼 개별화되고 파편화되지 않는 공통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게 목표다. 류 대표는 “이해와 성찰은 타인의 생각을 얼마만큼 공감하느냐에서 시작한다”며 “‘타인의 고통’은 바로 이런 공감에 대한 책”이라고 말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