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가 만 책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The Survivors Club-How to Survive)다. 얼마 전 월트디즈니 미디어네트워크그룹 공동회장이 된 벤 셔우드가 ABC 사장 때 썼다.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얘기를 사회과학적으로 풀어냈다. 세월호 참사로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될 때 죽는다. 80%는 당황한 나머지 생존 기회를 잃는다. 10%는 있는 기회도 걷어찬다. 나머지 10%만이 합리적 판단과 침착한 행동으로 생존한다. 여러 유형이 있다. 사람마다 맞는 유형대로 차분한 마음가짐과 행동 습관을 들이면 재난 시 생존 확률을 더 높일 수 있다고 벤 셔우드는 주장한다. 개인뿐만 아니다. 사회 또한 그래야 한다.
이건희 회장을 눕게 만든 것은 급성 심장정지다. 심장 박동이 갑자기 멈추는 응급 상태다. 1분 이내 전기쇼크를 주면 생존율이 90% 이상이지만 이후 1분 지연 때마다 10%포인트씩 떨어진다니 치명적이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우리나라에서도 발생이 늘어난다. 지난해 생존율은 4.9%로 이전보다 높아졌다. 8~9%인 선진국에 크게 못 미친다. 자동 제세동기라는 응급장치 구비와 훈련이 미흡한 탓이 크다.
미국 라스베이거스는 도박, 음주, 흡연, 잦은 파티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급성 심장정지가 다른 곳보다 세 배 이상 더 많이 발생한다. 이를 주목한 구급 당국이 1997년 카지노 운영자들을 찾아 설득했다. 자동 제세동기를 소화기처럼 구비하도록 유도했다. 종업원에게 기기작동법과 함께 심폐소생술을 가르쳤다. 말썽꾼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24시간 도니 응급 환자도 빨리 찾는다. 라스베이거스 급성 심장정지 생존율은 놀랍게도 53%다.
국가 안전시스템을 개조하겠다는 청와대에 시사점을 준다. 어디 이것뿐인가. 대통령에게 민심 응급신호를 전달하지 못한 핵심 참모들로 인해 고장 난 국민소통시스템을 뜯어고칠 방향도 제시한다.
책에 이런 대목도 있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필립스는 ‘사고(accident)’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 원인에 대한 무지함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학저널은 2001년 아예 이 단어 사용 금지를 제안했다. 뭔가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 일로 ‘아주 흔하고 익숙한 불운의 한 형태’로 오인된다는 이유다. 저널이 그 대신 쓰자는 ‘인지던트(injident)’다. ‘부상(injury)을 초래하는 사건(incident)’이라는 뜻이다.
우리말 사고(事故)는 ‘뜻밖에 일어난 사건’을 뜻한다. ‘accident’랑 비슷해 보이지만 우연, 운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았다. ‘어떤 일의 까닭’이라는 뜻도 있다. 단어 쓰임새만 놓고 보면 우리 인식 수준은 영어권 나라보다 앞선다. 현실은 정반대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단어도 있다. ‘뜻밖의 발견을 하는 능력’이다. 18세기 영국작가 호레이스 월폴이 세렌디프(현 스리랑카) 세 왕자 이야기를 듣고 만든 단어다. 이 나라 왕은 세상을 직접 보고 배우게 하려고 왕자들을 추방한다. 세 왕자는 닥친 온갖 고난을 지략으로 이겨내고 부와 아내를 얻어 돌아온다.
세렌디피티는 마치 고난을 기다렸던 듯 행운으로 바꿔놓는 재능이다.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본다. 실패해도 달리 도전한다. 벤 셔우드는 최고 생존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재능이라고 말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남까지 구한다. 리더십 위기에 직면한 대통령, 관피아 비판에 휩싸인 관료집단, 오너 공백인 재벌기업에게 정말 절실한 재능이다. 하지만 사고와 마찬가지로 이 재능도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