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은 타이밍이다. 산업정책은 특히 그렇다. 야구로 치면 적시안타다. 득점권에 주자를 내보내놓고 홈으로 불러들이지 못하는 산발 안타는 승리에 도움이 안 된다. 타이밍은 주식투자에서도 중요한 요소다. 과감하게 들어가야 할 시점인지 아니면 미련 없이 털고 나올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종목을 선별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세계 전기자동차 시장에 시동이 걸렸다. 글로벌 업체들은 전기차 한두 종을 생산하거나 생산할 예정이다. 예전에는 정부의 압력에 눈물을 머금고 만들었다면 지금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생산라인을 깔고 있다.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내연기관에 올인하겠다며 완강히 버티던 현대·기아차 역시 지난해부터 전기차를 함께 가져가겠다며 경영기조를 바꿨다. 물론 친환경차를 만들겠다는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다. 기업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 때문이다.
1996년 미국 제너럴모터스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전기차의 생산·판매를 강제하는 법을 발의하자 강력한 로비력으로 관련법을 막았다. 2003년에는 출시한 전기차 생산마저 중단했다. 하지만 2010년 한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 ‘시보레 볼트’로 다시 시동을 걸었다. 내연기관 대형차만 고집하다 구제금융까지 받은 GM이 죽였던 전기차를 다시 살리겠다고 나섰으니 세상사 아이러니다.
BMW의 순수 전기차인 i3가 순항 중이다. ‘뼛속’까지 친환경이라며 마케팅한 덕인지 유럽에서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i3에 자사 배터리를 탑재한 삼성SDI는 희색만면이다. 한국의 부족한 충전 인프라와 달리 유럽 도심에는 전기차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국토가 우리나라보다 작은 네덜란드는 전국적으로 4000여개의 공공 충전기가 설치돼 있다. 2000여개의 충전기가 공급된 암스테르담 거리에는 전기택시가 손님들을 기다리며 오늘도 대기 중이다.
전기차의 운명은 충전 인프라가 쥐고 있다. 1회 충전으로 달릴 수 있는 거리는 평균 120㎞다. 수시로 충전해야 하는 스마트폰과 같다. 배터리가 언제 방전될지 모르니 장거리는 언감생심이다. 소비자의 선택을 어렵게 하는 요소다. 그럼에도 전기차가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동반성장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차 시장이 확대되면 이차전지 등 부품산업과 전력·건설산업이 더불어 성장한다. 도심 곳곳에 전력충전소가 만들어지고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융합모델도 등장할 수 있다.
문제는 사회적 합의다. 환경부가 ‘저탄소차협력금제’ 도입을 공론화하자 찬반 논란이 뜨겁다. 국내 완성차업계는 ‘또 하나의 세금’이라며 반발한다. 환경부도 완화 쪽으로 선회했지만 여전히 시선은 따갑다. 살펴보면 저탄소차협력금제도는 전기차 시장이 정부 주도하에서 민간주도로 바뀔 수 있는 중요한 패러다임 변화다. 언제까지 전기차 구입비용을 정부예산으로 충당할 수 없다. 사회가 지원금을 포기할 수 없다면 정부는 ‘가축 방귀세’ ‘비만세’ ‘빗물세’와 같은 또 다른 명목의 세금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지우는 묘수를 짜낼 개연성이 높다.
‘착한 규제’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좋은 규제’는 산업발전과 시장 활성화를 견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정부가 초기 산업토대를 닦았다면 기업은 상업화를 주도하고 시장도 만들어야 한다. 정부의 지원금만 믿고 산업이 확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감나무 밑에 누워서 연시가 입 안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9회 말 역전 홈런이 그렇듯 절호의 기회는 최악의 타이밍에 찾아온다.
김동석기자 ds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