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정부 조직개편 등 후속 이슈들이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벌써 국민적인 ‘안전 화두’는 조용히 잊히는 것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1993년 서해 페리호 침몰,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올 초 있었던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에 이은 미증유의 세월호 재난으로 우리 사회는 총체적 부실의 참담한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비극은 변주됐을 뿐 끊이지 않았다.
업주는 규정을 지키지 않았고 당국은 관리감독을 소홀히 했다. 시스템과 매뉴얼은 성글고 옹색했다. 돈벌이와 성장이란 미명 아래 인명(人命)은 소모품처럼 내팽개쳐졌다.
슬픔과 분노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반성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국상(國喪)을 논하는 와중에도 사고는 도처에서 꼬리를 물었다. 세월호 참사 보름 만에 사상 초유의 지하철 전동차 추돌사고가 일어난 데 이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선 철거 중이던 5층짜리 건물이 주저앉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인재(人災)에서 빚어진 숱한 참사 속에서도 타산지석의 가르침은 창고 안의 먼지인 백서에만 담겨 있었다. CNN 등 해외언론도 세월호 참사를 전하며 “한국은 룰(rule)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라고 일갈했다. 있어도 무용한 제도, 알고도 지키지 못하는 법이 반복되는 재앙을 낳았다.
흔히 ‘위기관리 매뉴얼’이라 불리는 것이 바로 그랬다. 정부는 그동안 자연재해를 비롯해 발생 가능한 모든 위기상황을 예측해 3400개가 넘는 대응 매뉴얼을 갖추고 있었다. 모자라거나 없어서 재앙을 막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로 안전에 관한 대부분의 매뉴얼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어 위기 상황에서 유연성을 발휘하기 어려웠고, 그 내용도 현장과 동떨어진 것이 많다. 까다로운 규정에 복잡한 절차까지, ‘보고를 위한 보고서’, 행정절차 중심의 매뉴얼이 ‘위기관리’라는 표지를 달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것이 정부만의 예일까. 기업과 민간의 안전 불감은 더욱 광범위하다. 아직도 일부 공사 현장에선 추락 사고를 예방할 안전망 설치는 물론이고 작업자를 위한 안전띠와 안전모조차 지급하지 않는 때가 허다하다. 기업 단위의 안전교육이 ‘책자 읽었다’는 서명만으로 끝나는 일도 다반사다.
아무리 상세하고 각본 좋은 매뉴얼이라 해도 이를 실행할 당사자가 사전에 훈련해본 적이 없거나 그 내용조차 잘 모르고 있다면, 이는 분명 죽은 매뉴얼이나 다름없다. “좋은 정책이 있어도 모르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한 대통령의 앞선 지적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대신 해주겠지’ 하는 무책임한 믿음, ‘그동안 별 일 없이 해온 일인데 이제 와 설마’라는 안일한 태도, ‘빨리빨리’와 ‘적당히’가 삶의 요령으로 회자되는 속도만능의 문화가 우리 사회의 안전을 허물고 부실을 키웠다.
안전에 관한 만병통치 매뉴얼이란 없다. 최고의 안전은 스스로 익히고, 지키는 것이다. 시간이든 비용이든, 투자한 만큼 줄일 수 있고 준비한 만큼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안전이다. 원칙과 기본에 충실하면서 사소하고 평범한 일조차 주어진 과정을 철저히 지켜나갈 때 안전은 우리의 생활이 되고 목숨이 된다. 안전이 부단한 연습이고 배움이어야만 하는 이유다.
진도 바다 물속에 아직도 남은 이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생명을 품었던 작은 우주다. 마지막 실종자 한 사람까지 가족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상권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 easymind1004@kesc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