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멈춰버린 회사 성장세다. 세계 반도체 중고장비 시장에서 점유율이 크게 높아졌는데도 성장은 벌써 몇 년째 제자리다. 이유는 간단하다. 1등만 살아남는 ‘승자독식’ 구도가 세계적으로 심화됐기 때문이다.
주 고객은 중간 규모인 이른바 ‘2등 그룹’ 업체들이다. 이 2등 그룹의 수익성은 지난 몇 년간 지속적으로 그리고 큰 폭으로 떨어졌다. 스마트폰 등 모바일 시장 탓이다.
언론에서 삼성전자와 애플이 모바일시장 전체 수익의 106%를 차지했다는 보도를 봤다.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관련 업체 수백 곳의 이익을 모두 합치면 되레 6% 적자라는 얘기다.
모바일기기는 2등 그룹의 텃밭인 게임기, MP3 플레이어, 디지털카메라, 내비게이션 등을 하나하나 집어삼켰다. 뒤늦게 뛰어든 2등 그룹 업체들도 부진했다. 이미 조 단위의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 미세공정을 구축한 1등 그룹을 따라잡을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바일 시장이 낳은 기회와 이익은 ‘1등 그룹’에만 쏠렸다. 한국 반도체 시장에서도 1등 그룹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제외하면 2등 그룹에서 의미 있는 수익을 내는 업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반도체 전체 시장도 마찬가지다. 인텔, 퀄컴 등 1등 그룹 업체들이 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가고, 투자도 비슷하다. 올해 삼성전자·인텔·TSMC 3개사의 투자는 전체 반도체 설비 투자의 52%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됐다.
이에 반도체 중고장비 시장도 큰 타격을 입었다. 세계 반도체 중고장비 시장 규모는 연평균 3조원 정도였으나 이런 승자독식 구도로 인해 최근에는 1조5000억~2조원 정도로 줄었다.
국내 반도체 중고설비 업체들은 설상가상의 상황에 놓였다. 중고설비 시장은 반도체 산업을 뒷받침하는 소중한 인프라 중 하나지만 그간 국내에서는 그런 인식이 없어 사회적 관심이나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중고장비 시장은 3000억~5000억원 크기로, 그 안에 300여개의 중소업체들이 가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 승자독식 구도가 반도체 산업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동안 논란이 됐던 골목상권 문제도 승자독식 구도로 인한 양극화 현상이다. 세상은 1%의 승자가 나머지 99%의 부를 독차지하는, 1등에게만 모든 보상을 쥐어주고 뒤따라온 2등은 패배자로 낙인찍는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바람에 속도가 붙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이탈리아 인구의 20%가 국가 전체 재산 중 80%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명 ‘파레토의 법칙’이다. 경제학의 통설로 여겨지는 이 법칙은 이제 옛말이 됐다. 세계시장의 단일화가 가속화하면서 소수의 회사가 독식을 하는 현상이 거의 모든 산업 분야, 전 세계에 걸쳐 벌어지고 있다.
최근 업계에서는 모바일에 이은 다음 트렌드를 ‘사물인터넷(IoT)’으로 예상하고 있다. 사물인터넷 세상은 빛·소리·움직임 등을 디지털 신호로 바꿔주는 센서 등 다품종 소량생산 반도체가 주를 이룰 것으로 판단된다. 이 때문에 2등 그룹에도 새로운 기회가 올 것 같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시장이 본격 개화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2등 그룹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오히려 이 트렌드는 백화점식,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해온 우리 대기업들에 힘든 여건을 조성할 것이다. 한국 시장에서야 1등 그룹이지만 작금의 사업 구조로는 해외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2등, 3등 그룹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두 가지다. 사업 규모를 키우는 등 확대 전략으로 아예 선두권에 확실히 진입하든지, 다른 경쟁사가 쫓아올 수 없는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고객가치를 높이는 차별화 전략을 택하든지 말이다. 전자는 승자독식의 늪을 더욱 깊게 파는 꼴이, 후자는 그 늪에 모래를 뿌리는 일이 될 것이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선택하겠다. 보다 더 나은 산업 생태계와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bruce@surplusglob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