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투자 가뭄에 시달렸던 반도체 장비 업계가 최근 매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말 시작된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설비 투자 덕이다. 하지만 신규 투자가 끝나면 또 어떻게 될지 막막하다.
국내 반도체장비 업체들 대다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 한 곳에만 매출을 의존한다. 사업 초기부터 해당 고객사와 협력해 설비를 개발하면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판로를 다각화하거나 확대하려 하면 공급사(밴더)에서 배제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고객사를 다변화하지 못했다.
문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하소연일 수 있만 상황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대기업인 고객사가 갈수록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수율에 영향을 미치는 일부 소모성 부분품도 과거 10개 쓰던 것을 1개로 줄일 정도다. 업계는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납품 단가 인하 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며 아우성이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설비 투자가 실종되면서 국내 장비 시장에는 한파가 몰아닥쳤다. 위기에 빠진 장비 업체들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강화한다는 목표 아래 제각각 살길을 찾아 나섰다. 독자 기술로 틈새 시장을 노려 성공한 업체도 몇 있지만 대다수는 그때 모습 그대로다. 둘 중 하나다. 실력이 부족하거나 눈치 보기에 급급해 현실에 안주한 결과다.
그 사이 세계 장비 시장의 1·3위를 각각 차지하고 있는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AMAT)와 도쿄일렉트론(TEL)은 공격적인 합병을 선언했다. 일각에선 가격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삼성·SK하이닉스가 국내 장비 업체들에 대한 지원을 늘릴 것이란 희망섞인 얘기가 나온다. 장비 업체들이 고객사 다변화에 적극 나서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다. 당장 달콤해 보일지 모르나 허황된 기대일 뿐이다.
이대로라면 국내 장비 산업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고객사 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고객사 타령만 할 것이다. 지금이 적기다. 잠시 여유라도 있을 때 변신을 시도해야 기회가 있다.
김주연기자 pilla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