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현경장(解弦更張). 거문고 줄을 바꾸어 맨다는 뜻이다. 중국 한나라 동중서가 무제에게 글을 올렸다. “줄을 바꿔야 하는데도 바꾸지 않으면 훌륭한 연주가라 하더라도 조화로운 소리를 낼 수 없으며, 개혁해야 하는데도 실행하지 않으면 대현(大賢)이라 하더라도 잘 다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사자원관리(ERP)의 목적은 거문고 줄을 다시 매듯 기업의 프로세스를 혁신해 성과를 견인하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 ERP가 도입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ERP를 도입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여전히 60% 이상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답했다. 따라서 목적을 정확히 짚어보는 일은 꼭 필요해 보인다.
ERP가 혁신의 도구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구축하는 시점에서 표준을 통한 혁신을 간과하는 경향이 크다. ERP를 도입한다고 하면 담당자들은 회사의 모든 업무를 한방에 풀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한다. 평소 가렵고 손이 많이 갔던 일을 모두 담으려 하니 개발은 많아지고 표준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회사 프로세스를 표준에 맞추기보다 현상에 표준을 맞추는 식이 되는 경우다.
내부 통계를 보면 ERP 전체 기능범위 중에서 표준을 벗어나 추가 개발한 분량이 전체의 40%를 차지한다. 40%를 개발하기 위해 프로젝트 리소스의 4분의 3이 투입된다. 구축 시 부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표준에서 떨어져 개발된 항목의 사용률을 분석해 보면 1년 후 미사용 항목이 60%에 이르고, 이슈사항은 표준항목의 20배에 이른다. 개발에 초점이 맞춰진 프로젝트는 결국 운영에 넘어가서도 애를 먹는 일이 다반사다.
시스템 구축은 먼 장거리 여행에서 베이스캠프를 마련하는 것과 같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학습하고 그 학습된 표준을 중심으로 업무를 혁신하는 관점(PI:Process Innovation)의 접근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구축과 운영에 대한 불균형적 시각이다. ERP를 구축할 때 회사의 모든 관심과 리소스가 집중된다. 경영자도 관심이 있고 전사적으로 모든 부문에서 이슈다. 하지만 그런 캠프파이어가 끝나면 운영은 소소한 일상일 뿐이다. 전체 조감도를 갖고 운영 혁신의 관점에서 ERP를 활용해야 하는 당위는 간과되기 십상이다. 운영비용은 매년 절감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ERP는 전사 프로세스를 최적화해주는 통합 시스템이다. 업무별로 표준 프로세스와 필수 요건을 따르도록 정의돼 있다. 회사는 지속적으로 표준과 필수 요건에 비춰 데이터의 흐름과 일정을 모니터링해야 한다. 표준과 기준에서 벗어난 현상들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논의를 통해 개선해야 한다. 이것이 운영 혁신이며, 운영 관점에서 ERP 역할인 PI(Process Improvement)인 셈이다. 정기적인 운영 점검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꿈꾸었던 성장과 혁신은 줄 끊어진 거문고와 다르지 않다.
ERP가 현장의 일을 혁신하고 성과를 견인하는 역할을 할 것인가. 도입을 고려하고 있는 기업들의 대답은 “예”라고 하더라도 그 도전은 만만치 않다. 표준을 중심으로 한 업무 혁신에 대한 갈망, 지속적인 시스템 모니터링을 통한 개선 의지가 절실하다. 그런 갈망과 의지로 구축은 베스트 프랙티스 중심으로 표준을 도입하면서 비중은 줄이고, 운영은 지속적인 개선을 통해 성과를 늘려가는 게 바람직하다.
시스템 도입은 어떤 순간의 이벤트가 아니다. 기업의 성장, 외부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야 한다. ERP를 도입하려는 고객사도 ERP 구축·지원하는 컨설팅사도 이런 관점에서 철저한 준비와 실행이 필요하다.
하영목 비앤이파트너스 대표 ymha@bnepartner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