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와 소재 사업을 동시에 영위하는 케이씨텍은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LG디스플레이·하이닉스가 모두 고객사다. 특정 제품을 독점 공급하는 기업을 제외하면 이런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국내에서 매우 드문 사례다.
고객사의 설비 투자에 따라 매년 수주 실적이 바뀔 수는 있지만 고객사별 공급 비중도 비슷하게 이어가는 편이다. 사업 부문 내에서도 장비와 소재 어느 한쪽에 치중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회사는 처음부터 성장이 더디더라도 건전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지난해에는 설비 투자 침체에도 불구하고 소재 사업이 뒷받침돼 양호한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대중소 동반성장을 논할 때마다 ‘교차 공급’은 단골 메뉴다. 부품·소재나 장비 기업에는 규모의 경제를 이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발판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제다.
하지만 업계에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아무리 정부가 강력한 동반성장 정책을 펼친다고 하더라도 실제 거래 관행을 개선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폐쇄적인 거래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삼성·LG 등 갑이 먼저 생태계 조성을 위해 나서야만 한다.
중소 협력사들 또한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쪽에만 공급할 경우 물량을 더 주겠다는, 혹은 가격을 높여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노키아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휴대폰 부품을 공급했던 협력사들은 30% 룰을 지켰다. 국내 제조업 현실에서는 너무나 생소한 일이지만 노키아가 이를 권장했기에 가능했다. 긴장 관계가 있어야 사업 구조가 건강해진다는 믿음에서다. 비록 노키아는 몰락했지만 지금도 당시 협력사들은 노키아를 그리워한다. 노키아 향수라는 말도 생길 정도다.
의존도가 높을 경우 리스크 관리가 힘들다는 것은 삼성 내 계열사 실적으로도 입증됐다. LG화학·LG디스플레이·LG이노텍 등 LG그룹 부품소재 계열사들은 상대적으로 삼성그룹보다 관계사 의존도가 낮다. LG전자가 어려워지면서 해외 시장을 개척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위기 의식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고객을 다변화하는 요인이 됐다. 삼성전자 의존도가 높았던 삼성디스플레이·삼성전기·삼성SDI 등은 최근 삼성전자 스마트폰 사업 실적 악화와 함께 어느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난 1분기 삼성디스플레이는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으며, 삼성전기는 가까스로 흑자를 낸 정도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특정 고객사에 치중하는 거래 관행을 지금이라도 바꾸지 않으면 국내 제조업 생태계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면서 “환경 조성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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