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구멍이 무수하게 뚫린 종이를 전산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컴퓨터에 입력해 전산 숙제를 한 적이 있다. 그 큰 컴퓨터는 집집마다 하나씩 소장하는 가정용 컴퓨터로 바뀌고 무릎 위에 놓고 쓸 수 있는 노트북 컴퓨터로 진화했다. 이제는 우리 바지 주머니와 초등학생의 조그만 손바닥 안에도 컴퓨터가 존재한다. 컴퓨터가 네트워크 발전과 함께 우리 몸으로 점점 더 가까이 온 것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항상 내 몸에 부착돼 있는 착용형 컴퓨터, 즉 웨어러블 기기 세상이 왔다. 포스트 스마트폰 세상을 열어줄 웨어러블 기기는 손목에 부착하는 스마트 시계와 스마트 밴드로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한다. 이 다음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으로 구글은 구글글라스를 내놓았고, 페이스북은 헤드마운티드 디스플레이(HMD) 시제품을 막 출시한 신생기업 오큘러스VR를 약 2조원에 인수했다. 스마트 안경은 새로운 제3의 눈, 제3의 디스플레이로 우리를 가상 세계로 인도한다.
스마트 안경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구글글라스와 같은 정보 기기로서의 저해상도 안경과 HMD와 같은 고해상도 엔터테인먼트용 안경이다. 앞을 보면서 걸어가거나 작업을 하거나 운전을 하면서 사용하는 스마트 안경은 자동차 헤드업디스플레이처럼 주인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정보를 전달해 준다. 반면에 HMD와 같은 스마트 안경은 의자에 앉거나 기차·비행기·자동차 좌석의 환경에서 보다 큰 화면과 현장감 있는 영상을 즐기기 위한 용도다. HMD에 움직임 센서를 달고 3차원(3D) 게임을 해보면 마치 내가 가상현실 속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HMD는 안경이라기보다는 제3의 TV 또는 모니터라고 보는 게 맞다.
이러한 용도의 차이로 구글글라스는 HD 4분의 일에 불과한 해상도여도 괜찮은 것이고, HMD는 HD 이상의 고해상도에 40인치 이상(2m 기준)의 대형 화면을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곁에 이런 스마트 안경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는 뭘까? 구글글라스는 최첨단 패션에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착용해보면 한쪽 눈으로만 보는 것이라 불편하기도 하고, 배터리 문제로 계속 켜짐과 꺼짐을 반복하게 돼 적절한 사용 용도를 찾기가 어렵다. HMD는 고화질로 대형화면을 구현하다 보니 디스플레이 부품과 반도체 칩세트의 전력소모가 커져 배터리와 제어회로를 별도의 박스로 구비해야 한다. 광학 부품도 커, 안경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헬멧 수준이 돼 버렸다. 이 모든 것이 디스플레이 부품과 관련 반도체 칩세트의 전력소모 때문이다.
저전력 반도체 칩세트가 구현되면 HMD도 기존처럼 헬멧 크기가 아닌 선글라스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작은 크기로 만들 수 있다.
최근 선글라스 수준의 HMD를 가능케 할 결실을 얻기도 했다. 지금은 컴퓨터를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제 50인치 이상의 대형 TV를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는 세상도 머지않았다.
주변의 모든 전자 기기가 사용자의 경험(UX)을 현장감 있게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 뇌가 경험하는 세상은 ‘현실’에서 ‘가상현실’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우리 뇌가 받아들이는 시각, 청각, 촉각의 감각 중 스마트 안경은 가상 입체 영상으로 시각을 속인다. 스마트 안경을 쓰는 순간 우리의 뇌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뇌’의 주인공 마르탱처럼 제한된 공간에서 벗어나 우리의 존재를 지구 반대편이나 머나먼 우주로 보내줄 수 있다.
김보은 라온텍 대표 Brian.Kim@raon-te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