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윤 작가의 아틸라, The 신라 제11회

하지윤 작가의 아틸라, The 신라 제11회

2. 너무 오래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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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십의 칼들을 서로 부딪히며 살육의 굉음을 만들어냈다.

“저는 많은 길을 만들었고 많은 족속을 만나고 많은 물건을 보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지식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지식이란 전쟁에 있어 창과 칼보다 더 유용할 뿐 아니라, 세상을 정복하는 가장 강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비로소 군신 선우는 폭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수 십의 칼들도 스스로 살육을 버렸다.

“내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보고들은 모든 지식을 전해준다면, 나도 용연향의 대상(隊商)들을 만나게 해주겠다.”

일제가 황제의 한혈마를 모욕한 한나라 잡놈 둘을 직접 처치했다는 소문이 궁정에 파다하게 퍼지며 그의 무용담이 수다거리가 되었지만, 좀처럼 무제는 일제를 따로 부르지 않았다.

“나는 아직 노예일 뿐이다.”

일제는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도 한혈마의 빗질에 여념이 없었다. 온 얼굴에 흰 두건을 꽁꽁 싸메고 눈동자만 빼곡이 상그름한 그는 마치 세상 잡사를 잊어버린 문둥이 꼴이었다. 빗질을 하며 떨어지는 자신의 땀이 행여 한혈마에게 누가 될까 이런 복장을 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날이 왔다. 무제가 연회를 베풀면서 궁정 마장의 말들을 사열한다는 소식이었다. 일제는 오히려 저절로 더욱 강건해졌다.

“드디어 하나의 때가 왔다.”

한혈마도 일제의 마음을 헤아리는지, 오늘따라 그 울음은 길었다.

히이잉, 히이잉 한혈마는 자신을 뽐내기 위해 자꾸 앞발질을 했다. 도약질이었다. 일제는 한혈마에게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다. 한혈마의 작은 얼굴, 긴 목, 좁은 가슴, 날씬한 허리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기다란 흑색의 털만으로 이미 그 전설은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햇빛마저 새롭게 태어나고, 작은 이파리마저 풋것이 되던 날, 드디어 여인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는 궁정 안을 종종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연회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대(大) 중원의 황제 무제의 연회다웠다. 무제를 비롯해 황후, 비, 공주, 왕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신하들이 진귀한 음식과 술을 앞에 두고 유쾌하고 떠들썩했다. 음악소리는 사람들 사이사이 흥청거렸다. 연약한 꽃잎들은 아름다운 여인들 얼굴 위로 걸터앉았다. 일제는 정신이 잃을 정도로 몽롱해짐을 느꼈다. 특히 여인들의 꼬인 콧소리와 여인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은밀한 향취는 거부할 수 없는 욕정이었다.

“어서 말을 사열하라.”

무제가 큰 소리로 외쳤다. 무제의 얼굴은 너무 멀어 가물했다. 수 십명의 마장 노예들은 자기가 보살피는 말을 끌고 차례로 사열하기 시작했다. 모두 사열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무제 앞을 지나쳐야 했다. 그러나 마장의 노예들은 아름답게 성장한 여인들을 힐끗힐끗 보느라 어떤 말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렸고 어떤 말은 잔칫상을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당장 말과 함께 목을 베어라.”

무제의 명령은 어쩌면 신령했다. 수 백의 칼들이 노예와 말을 끌고나갔다.

글 소설가 하지윤 lif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