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입국(科技立國). 과학기술로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잿더미 위에서 일어선 데는 과학기술의 힘이 컸다. 기술 수준이 국가경쟁력과 직결되는 지금도 그 중요성은 여전하다.
그런데 요즘 이 말이 조금 다르게 읽힌다. 과기‘입’국. 과학기술을 ‘입’으로만 외친다는 뜻이다. “과학기술을 정책 중심에 놓겠다”고 공언하며 출범한 현 정부의 과학정책을 두고 과학계에 실망감이 팽배하다. 말과 달리 과학은 정책 중심에서 계속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꿈틀대던 불만에 불을 댕긴 건 과학교육 축소 방침이다. 교육부는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을 만들며 과학과목 비중을 축소할 것으로 알려졌다. 가뜩이나 서러운 현실에 과학의 미래까지 건드린 꼴이다.
지난 21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주도로 16개 단체가 모인 기자회견장에는 결연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지방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상경한 이들도 있었다. 머리에 띠를 두르지는 않았지만 참가자들은 격앙돼 있었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정부 출연 기관장의 모습은 왠지 어색하면서도 서글퍼 보였다.
교육 문제 하나로 좁혀서 보기엔 상황이 엄중하다.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증가폭이 둔화되는가 싶더니 내년 예산 증가율은 물가상승률을 밑돌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과제 20여 개가 당장 사라질 위기다. 정부 출범 후 쌓여온 실망과 배신감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지기 직전이다.
과학계가 새 정부에 건 기대는 적지 않았다. 대통령 자신이 공대를 나왔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과학입국의 주창자였다. 후보자·당선인 시절에도 과학기술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지금의 정책이 그때의 말과 너무 다르니 과기‘입’국이라는 자조 섞인 비판이 점점 퍼진다.
지난 17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열렸다. KIST 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는 서예 작품 ‘과학입국 기술자립(科學立國 技術自立)’을 꺼내 전시했다. 자문위원 자격으로 회의장을 찾은 과학기술인들이 그 글귀를 보고 어떤 심정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