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방송장비 시장은 인력, 기술력, 유통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삼중고(三重苦)에 직면했다. 산업 구조 탓에 핵심 기술 전문인력은 방송장비 업계를 기피한다. 인력·자금이 부족해 원천 기술을 확보하기 어렵다. 공인·사설 방송사 등 주요 고객사가 국산 장비보다 해외 제품을 선호해 지속적으로 수익을 벌어들일 유통망을 확보도 여의치 않다. 취약한 산업 인프라가 갈 길 먼 방송장비 국산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방송기술산업협회(KSBE)가 지난해 하반기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방송장비업체 수는 제작, 송출, 송신, 플랫폼 사업을 포함해 180여개다. 최근 초고화질(UHD) 제작 장비 개발에 나선 중국의 방송장비업체 수가 2000개를 넘어 선 것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한국 방송장비 업계의 평균 연 매출은 41억원, 평균 고용 인원은 21명으로 각각 집계되며, 전형적인 중소기업 위주 산업 생태계를 형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종사자 수는 각 업체 임원, 관리직, 연구직, 영업직, 생산직 등을 합해 불과 5500명가량으로 조사됐다. 업계 총 직원 수가 수만명에 달하는 다른 산업의 대기업 하나보다 적은 셈이다.
방송장비 업계 관계자는 “석·박사 급 고급 연구인력은 급여와 복리후생제도에 민감해 중소기업이 중심인 방송장비 업계를 기피할 수밖에 없다”며 “디지털방송전환 종료 등 과도기를 겪으며 기존 업체가 도산하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어 고용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국내 방송장비 업계의 지속적 자금난·인력난은 기술 경쟁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국내 중소기업의 방송장비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지난 2009년 ‘방송장비 고도화’를 추진했다. 추경예산 140억원을 들여 2010년 말까지 25개 과제를 진행했지만 개발을 완료한 과제는 15개에 그쳤다. 이미 개발한 장비가 과제로 선정되는 등 문제가 발생했고, 일부 참여 업체가 내부 사정을 이유로 개발을 중단하거나 시장에서 철수했기 때문이다.
KSBE 관계자는 “일본 업체가 최근 선보인 UHD 방송장비는 최소 십수년 전에 개발 로드맵을 세운 것”이라며 “한국도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응용장비 R&D보다 중·장기적 사업 전략을 기반으로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내외 유통망을 확보하는 것도 방송장비 산업 활성화를 위한 선결과제 가운데 하나다. 현재 국내 방송장비 시장은 일본, 미국 등 해외 일부 업체가 시장 점유율 80% 이상을 차지했다. 국내 업체가 인력,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제품을 공급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판매 채널이 필수다.
업체 간 과다경쟁과 저가 출혈 경쟁으로 제품 가격이 급락하고 도산·폐업 등으로 사후서비스(AS)를 제공하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는 것은 문제점이다. 방송장비 산업 진흥에 관련된 기관·단체의 업무가 중복되는 것도 개선돼야 할 사항으로 지적된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 등 8개 기관·단체가 방송장비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이한범 KSBE 사무총장은 “정부 산하 기관과 단체가 방송장비 산업에서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해외 시장 개척 등에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가 업체 지원 창구를 일원화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방송장비 제조업 종업원 수 / 자료:한국방송기술산업협회>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