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끝난 월드컵에서 우승한 독일팀이 귀국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자축연을 벌이다 이른바 가우초 춤을 춰 인종주의를 부추겼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가우초란 남아메리카의 목동을 뜻하는 말로 결승전 상대였던 아르헨티나를 자신들이 이겼다는 의미로 “가우초는 이렇게 간다”고 노래하며 구부정하게 걷다가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독일인은 이렇게 간다”고 노래한 것이 화근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젊은 선수들이 열광적인 분위기에 도취돼 저지른 우발적인 실수였을 수 있지만 당사자인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유독 이번 월드컵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던 남미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독일이 또다시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냈다”며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월드컵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경기 전 선수들이 “우리는 인종주의에 반대한다(Say No to Racism)”는 큼지막한 플래카드를 내걸면서 인종주의의 종식을 다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유색인종 선수들이 어렵사리 영국이나 스페인 등 유럽 리그에 진출해서도 인종차별이라는 또 다른 장벽에 부딪혀 남몰래 고통 받는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얼마 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활약하는 브라질의 축구 스타 다니 아우베스는 악질 관중이 유색인종 선수를 비하하는 뜻으로 던진 바나나를 받아서 태연스레 먹고 공을 찼다. 많은 사람들이 인종주의에 의연한 자세로 대응했다는 찬사를 보냈다.
비단 축구 경기뿐인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전 세계에 생중계되기 때문에 유독 축구에서 인종차별이 두드러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인종주의는 별로 개선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진행형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폭격 과정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스데롯 산 정상에 의자를 가지고 올라 불길에 휩싸인 가자지구를 관람하며 새로운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환호하고 박수를 치는 모습이 한 덴마크 언론인에 의해 보도됐다. 전 세계 네티즌들은 “스데롯 극장의 이스라엘판 악마”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흔히 인종주의의 과학적 기반은 다윈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이 1869년 ‘대물림되는 천성’이라는 책과 함께 우생학(eugenics)이라는 말을 만들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골턴을 비롯한 우생학자들은 열등한 인종의 생식을 억제하는 일종의 사회개량 프로그램으로 우생학을 제창했다.
그 밑에는 흑인을 노예로 삼고 여성을 차별하고 부랑자나 하층민들이 상위 계층을 넘보지 못하게 막기 위해 그럴듯한 과학적 근거가 필요했던 당시 사회적 요구가 있었다. 더욱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우생학을 열렬히 지지했던 사람들은 괴팍한 비주류가 아니라 지금도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폴 브로카, 구스타브 르봉과 같은 주류 과학자들이었다.
인종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물이 아니며, 유전자를 비롯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이뤄질 때마다 신개념으로 치장해서 더욱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자기 변신을 계속하고 있다. 1994년에 하버드대의 심리학자 리처드 헌스틴은 ‘벨 커브’라는 책에서 “사회경제적 지위와 대물림된 지능 사이에 직접적 함수 관계가 있으며, 실업자가 될 경향은 나쁜 치아를 가질 경향과 마찬가지로 대물림된다”는 주장을 펴 큰 논란을 빚기도 했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인종주의가 끊이지 않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를 유전 탓으로 돌려 현 상태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인 것인 양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온존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다문화가정이 급증하고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공장이나 식당이 운영되기 힘든 우리나라도 인종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얼마 전 한 시민단체에서 살색이라는 말을 없애고 살구색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제기해 많은 공감을 얻었듯 우리 주변에도 인종주의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다.
인종주의는 변화를 억눌러 현상을 유지하고, 차별을 지속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세력들이 즐겨 활용하는 자원이며, 과학은 언제든 이런 세력에 의해 동원될 수 있다.
김동광 고려대 연구교수(BK21플러스 휴먼웨어 정보기술사업단) kwahak@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