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국무총리(Prime Minister)도 피엠(PM)이지만 내가 아는 피엠은 독한 무좀약 피엠인데….
▲송정희 자문관=네, 독하게 일하겠습니다.
2003년 7월 1일 오후 청와대 본관 2층 세종실.
정보통신부 주요 과제 보고회장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무좀약 이야기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진대제 정통부 장관(현 스카이레이크인베스트먼트 회장)이 노 대통령에게 정통부 간부들과 마스터 PM(Master Project Manager)으로 내정한 송정희 정책자문관(서울시 정보화기획단장, KT 부사장 역임, 현 한국여성공학기술인협회장)을 소개하자 노 대통령이 당시 널리 사용되던 무좀약 피엠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진 장관은 이날 야심차게 준비한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을 위한 IT 신성장 발전전략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보다 나흘 전인 6월 27일.
진 장관은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서 노 대통령과 독대해 정통부 주요 정책과제를 한 시간여 상세히 보고했다.
진 장관은 IT로 정보통신 일등국가 건설을 위한 중점 추진과제로 △IT 신성장동력 발전 전략 △통신시장 현황과 경쟁정책 방향 △외국 IT기업 R&D센터 국내 유치 추진 △한중 IT협력 강화 등을 보고했다.
진 장관은 이어 “IT 신성장동력 육성을 위해 장관이 직접 관리하는 R&D 책임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며 “품목별로 기술기획과 관리를 전담하는 민간 PM을 지정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진대제 장관의 증언.
“노 대통령에게 각 분야 전문가를 PM으로 임명하겠다고 보고했더니 ‘명칭이 무좀약 피엠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산 관계로 PM 계약은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이 맡고 일은 정통부에서 시키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그거 편법이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정부 부처 중에서 정통부가 처음 이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들에게 IT839의 9대 아이템을 하나씩 전담시켰습니다. 나중에 다른 부처에서도 이런 제도를 도입했는데 정통부처럼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이었습니다.”
진 장관은 대기업 CEO 출신답게 업무처리가 치밀하고 전략적이었다.
그는 장관 재임 시 추진한 각종 업무를 노트에 일지(日誌) 형식으로 꼼꼼히 기록했다.
장관의 국정(國政)노트였다. 노트만 16권이고 수첩은 수십권에 달했다. 대형 여행용 캐리어에 가득 찰 정도의 분량이다. 노트에는 일자별로 대통령 지시사항은 말할 것도 없고 국무회의 내용, 정통부 실·국별 토의사항 등을 깨알같이 기록했다. 사안에 따라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으로 표시하고 중요도에 따라 별표·동그라미·슬래시 등으로 달리 표시했다. 수첩 맨 뒤에는 대통령에게 보고할 주요사항 10여개를 항상 적어 놓았다.
진 장관은 IT 신성장동력 전략에 관해 기회 있을 때마다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어느 날 노 대통령이 “그러지 말고 청와대로 와서 내용을 소상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6월 27일 독대는 그렇게 이뤄졌다.
진 장관의 IT 신성장 발전전략 목표는 뚜렷하고 야심찼다. 크게 만족한 노 대통령은 “좋다. 한번 해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극히 이례적으로 7월 1일 오후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 주재의 IT 신성장동력 발전전략 보고회가 열린 것이다.
정통부는 그해 6월 15일 송정희 박사를 장관 정책자문관으로 임명했다.
송 자문관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대에서 석사, 카네기멜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삼성종합기술원 전자기기연구소 선임연구원,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부장으로 일하다 1999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를 거쳐 2001년에는 멀티미디어 교육솔루션기업인 텔레젠을 창업했다.
송 박사의 증언.
“4월께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정통부로 갔더니 여섯 명이나 와 있어요. 그 중에는 같이 근무했던 사람도 있었어요. ‘웬일이냐’고 했더니 ‘면접왔다’는 겁니다. 한 방에서 면접을 했는데 좀 거북하더군요. 당시 노준형 기획관리실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김앤장 고문)과 유영환 정보통신정책국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한국투자증권 부회장) 등이 심사위원이었는데 ‘어떤 산업을 육성해야 국민이 먹고살거리를 만들 수 있겠느냐’ 등을 물었습니다.”
송 박사는 정통부 13층에 사무실을 두고 진 장관의 정책을 자문했다. 당시 장관 정책보좌관으로는 최수만 청와대 행정관(한국전파진흥원장 역임, 현 오비맥주 부사장)이 임명됐다.
진 장관은 정통부 IT산업 중 기술에 관한 모든 정책은 송 자문관의 사전검토를 받도록 지시했다. 송 자문관은 마스터 PM으로서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1기 PM 선정 작업도 주도했다.
송 자문관의 말.
“PM은 모두 공모했습니다. 삼성과 LG에 근무하던 이윤덕, 박상훈 PM은 해당 기업 임원을 만나 사전 양해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진대제 장관은 그해 9월 19일 오전 9시 30분 IT 신성장동력을 실질적으로 이끌 1기 PM 8명에게 위촉장을 수여했다.
진 장관은 이 자리에서 “IT산업이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을 이끌도록 PM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며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맡은 분야를 책임지고 이끌어 달라”고 당부했다.
PM 업무를 총괄하는 마스터 PM은 이미 그 역할을 해온 송정희 정책자문관이 맡았다.
지능형 로봇 분야는 오상록 박사(현 KIST 강릉분원장)가 PM으로 위촉됐다.
오 박사는 서울대를 거쳐 KAIS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일본기계연구소, 미국 IBM 왓슨연구소, KAIST, KIST 등에서 지능형 로봇 분야를 연구했다.
차세대 이동통신 PM을 맡게 된 조동호 박사(현 KAIST 교수)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KIST와 경희대를 거쳐 KAIST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소프트웨어(SW)솔루션 분야를 맡은 박세영 박사(현 경북대 교수)는 파리 7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ETRI 컴퓨터소프트웨어연구소 부장 및 서치캐스트 대표로 일했다.
홈네트워크 및 디지털TV를 맡은 김태근 디컴앤디티비 부사장(현 사업)은 뉴욕주립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시스템공학연구소, ETRI 등을 거쳐 디컴앤디티비로 옮겨 부사장으로 일했다.
텔레매틱스 분야를 맡은 이윤덕 연구원(현 성균관대 교수)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삼성전자통신연구소 차세대연구팀에서 일했다. 분산처리시스템, 주전산기 개발 등 폭넓은 개발 경험을 갖췄고 휴대폰 근간의 텔레매틱스 서비스 과제를 기획, 상용화했다. 텔레매틱스 개발 책임자로서 관련 핵심 기술을 개발했다.
IT SOC 및 차세대 PC 분야 PM은 유회준 교수(현 KAIST 교수)가 맡았다. 유 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KAIST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벨연구소, 현대전자, 강원대를 거쳐 KAIST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브로드밴드 컨버전스 네트워크(BCN) 분야의 박상훈 PM(현 사업)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1979년 금성통신에 입사 후 LG전자 기간망연구소장으로 근무했다. TDX, ATM, CDMA 등 정부의 교환기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 상용화에 참여했다.
맨 마지막으로 2004년 3월 19일 디지털TV방송 분야 PM으로 전병우 교수(현 성균관대 교수)가 위촉장을 받았다. 그는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미국 퍼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삼성전자 신호처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낸 뒤 성균관대 교수로 일했다.
PM들은 △기술 기획 △성과 관리 △중간평가 △다음 연도 투자규모 등 계획수립 △연구개발 완료 후 기술이전까지 전 단계를 책임지고 관리했다.
진대제 장관은 처음에는 매주 1회, 나중에는 월 1~2회 PM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는 차관을 비롯해 PM 전원과 정보통신정책국장, 관련 실·국장, 실무진이 참석했다.
송정희 박사의 말.
“진 장관은 한번 회의를 했다 하면 몇시간씩 했어요. PM들은 업무량도 많았지만 기존 질서를 깨고 새로운 R&D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더 힘들었습니다.”
당시 이 PM 업무를 담당했던 김광수 정통부 기술정책과 R&D기획담당 서기관(현 청와대 행정관)의 말.
“당시 진 장관이 주재한 회의는 PM들이 먼저 업무 내용을 발표한 후 토론을 통해 사안을 정리했습니다. 일단 확정이 되면 곧바로 추진했습니다. 원래 PM제도는 이상철 전 장관(현 LG유플러스 부회장)이 구상했으나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도입하지 못했습니다. 진 장관께서 정부 부처 중에서는 처음으로 PM제도를 도입한 것입니다. PM들이 IT839 전략의 9대 신성장동력을 하나씩 맡아 추진했습니다.”
진 장관은 외부 인사들과 기술 관련 회의를 할 때도 분야별 PM을 꼭 참석시켜 의견을 물었다.
PM들은 주간 점검회의와 기획위원회 운영, 국가 신성장동력별 위원회 참석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PM들은 정기 업무보고서도 제출했다. 주간보고서에는 주간 일정과 향후 계획, 업무 추진 배경, 과제 목표, 내용, 예산, 추진실적, 쟁점사항, 지시사항 등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됐다. 박세영, 조동호, 김태근씨 등 일부 PM은 다른 부처 회의에도 참석했다.
PM은 계약기간이 2년이었다. 2기 PM은 일부 변동이 있었다. 송 박사가 마스터 PM직을 그만두자 오상록 박사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노 대통령은 2004년 2월 4일 정통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공무원 조직과 민간이 중간영역에서 만나는 PM제도를 정부 차원에서 검토해 결론이 나면 각 부처가 필요한 인력을 배치해 상시적으로 정책 자문을 받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정통부 PM제도를 벤치마킹한 제도를 시행했다.
정통부가 사상 처음 도입한 PM제도는 외부 전문가들이 국가 R&D를 기획 단계부터 관리 운영함으로써 업무 효율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곧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IT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