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떠올리기 싫은 아픈 기억, 잊고 싶은 슬픈 기억 한 두개쯤은 가지고 산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강렬한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픈 기억은 정신에 그치지 않고 육체에도 해를 가한다.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대표적이다. 이럴 때 잊고 싶은 기억을 잊을 수 있다면, 인간의 기억을 통제할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 통제’를 소재로 한 영화 ‘더 기버 : 기억전달자(The Giver)’가 개봉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로이스 로우리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더 기버 속에는 ‘커뮤니티’라는 유토피아와 같은 시스템이 등장한다. 커뮤니티는 전쟁, 차별, 가난, 고통 없이 모두가 행복한 시스템이다. 얼핏 행복해 보이는 커뮤니티지만 사실은 감정과 감각 등을 통제한다.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믿기 때문에 아예 자유의지를 제거한다. 통제된 기억과 감정만 가지도록 제한한다.
커뮤니티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 조너스는 직위 수여식에서 ‘기억보유자’ 임무를 부여 받는다. ‘기억전달자’와의 훈련을 통해 조너스는 사물의 색깔과 진짜 모습, 기억, 감정, 선택의 자유 등의 존재를 알게 된다. 완벽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커뮤니티의 문제를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거된 기억을 전달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
과연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억을 통제하면 행복할까. 기억 통제를 다룬 영화는 ‘맨인블랙’ 등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사용됐다. 영화를 넘어 현실에서도 기억을 통제 혹은 제거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다. 너무나 고통스런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연구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은 광학 레이저〃〃로 뇌신경을 자극해 특정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했다. 뇌의 시냅스 결합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실험을 통해 기억을 없애거나 다시 상기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쥐에게 레이저와 전류를 같이 보내 특정 신경을 자극하고, 두려움을 가질 때까지 학습시켰다. 이후 레이저만 보내고 전류를 보내지 않는 방식으로 앞서 형성된 두려움을 쥐의 기억에서 제거했다. 학습을 통해 기억을 덮어씌워 기존 두려움을 없애는 방식이다.
연구팀은 신경 자극으로 시냅스 연결을 강화하거나 약화함으로써 동물에 두려움을 주거나, 다시 두려움을 연상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도 기억 제거 연구가 진행 중이다. KIST 연구팀은 생쥐의 뇌에 전기 자극을 줘 공포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이 공포기억을 없애지 못하는 돌연변이 생쥐에게 작은 전극을 넣어 전류를 흘리자 신경신호를 전달하는 뉴런이 활성화해 공포기억 소멸이 촉진됐다. 이 연구를 활용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불안장애 등을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기억 제거법을 인간에게 적용하는데는 의학적인 문제 외에도 인간의 정신적인 발전과 성숙을 위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윤리적인 질문이 항상 뒤따른다.
권건호기자 wingh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