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방한과 겹쳐 광복절 기념식이 없는 듯 지나갔다. 전통적으로 대통령 대북 제안을 듣는 자리다. 세월호 참사로 후순위에 밀렸지만 올해도 어김없었다. 대통령은 북핵 위험 제거를 촉구하면서도 한반도 생태계 보전, 북한 생활환경 개선, 문화유산 공동사업을 제안했다. 원칙을 고수할 군사안보 외의 분야는 유연하게 가겠다는 뜻이다.
북한은 ‘5·24 조치 해제’가 없다며 제안을 일축했다. 하지만 고위급 접촉 제안에 대해 언급을 자제했다. 다음 달 인천 아시안게임도 예정대로 참가한다. 대화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뜻이다. 아시안게임 이후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 수 있다.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에 새삼 눈길이 쏠린다. ‘통일대박론’과 ‘드레스덴 구상’을 구현할 핵심 기구다. 정부부처 장관과 유력 정치인, 민간위원, 분과별 전문위원과 자문단까지 줄잡아 130여명이다. 그러나 인적 구성에 문제가 있다.
일부 반통일적 인사 논란을 잠시 접자. 이 많은 사람 가운데 박 대통령이 창조경제 동력으로 삼은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 관련 인사가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 미래부, 산업부 장관마저 빠졌다. 통일 준비에 기술과 산업은 필요없다는 인식인 셈이다.
‘뭐가 중요하냐’는 반문은 뭘 모르는 말이다. 기술, 특히 ICT는 가장 먼저 통일을 준비할 분야다. 표준화부터 인프라 설계까지 할 일이 수두룩하다. 어쩌면 통일 물꼬를 가장 먼저 틀 수도 있다. 체제, 이념이 달라도 기술만큼은 중립적으로 여기는 덕분이다. 별 저항이 없다. 남북한 공동 운영으로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 평양과학기술대학이 단적인 사례다.
ICT 산업이라면 이해관계까지 일치한다. 남북 모두 미래 성장동력이다. 비교우위가 달라 협력 여지도 많다. 남한은 기술력이, 북한은 낮은 임금에도 우수한 인력이 있다. 북한 제조 경쟁력은 노키아까지 생산을 몰아준 베트남보다 낫다. 개성공단에서 이미 검증했다. 더욱이 북한은 소프트웨어 개발 역량도 있다.
정보통신망은 전력, 도로, 철도, 에너지와 함께 사회 기간 인프라다. 북한 산업 발전뿐만 아니라 주민 삶 개선을 활용한 남북 격차 해소에도 도움이 될 투자다.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반드시 해야 한다. 미리 준비하고, 특히 인프라를 통합 구축하면 비용을 확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고민할 사람이 통일준비위에 전혀 없다.
북한은 중국·러시아는 물론이고 유럽까지 육로로 잇는 관문이다. 북한을 거치면 에너지부터 상품까지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인다. 제조 산업기지라는 가치도 덩달아 커진다. 남북관계 경색 틈을 타고 일본과 중국이 이미 선점 작업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민생 문제 해결이 가장 절실한 북한 정권이다. 기술·산업 협력 제안은 적어도 환경·문화 협력보다 북한에 더 먹힌다.
내년에 광복과 분단 70주년을 맞는다. 이산가족이 줄어들면서 우리 사회에 통일 무관심에 무용론까지 번진다. 이 점에서 ‘실보다 득’이라는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은 적절할 때 나왔다. 지금부터라도 비용 조달을 비롯한 통일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해야 한다.
맨 앞에 기술과 산업이 있다. 인프라 구축설계부터 통일 한반도 산업지도까지 그릴 청사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전문가를 찾지도 않는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통일준비위야말로 준비가 덜 됐다.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