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전자·자동차 등 우리 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이끈 시장 대응형 혁신은 2010년대 들어서면서 근본적 도전에 직면했다. 과거에는 우리 기업이 기술 개발을 시작할 때 이미 선도 기업 제품은 출시된 상태였고, 이들을 모델 삼아 어떻게 하면 빠르게 비슷한 제품을 개발해 내는가가 주요 과제였다.
그러나 대부분 산업이 후발주자의 거센 추격으로 레드오션화되고 이를 탈출해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기 위한 시장 창출형 혁신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문제는 혁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모델이 될 만한 제품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갈래 길에서 실패 리스크를 감수하고 혁신기술에 도전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시장창출형 혁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물’과 ‘프로세스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 재임시에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로버트 라이시가 ‘부유한 노예’라는 책에서 21세기 기하급수 경제를 이끄는 대표적인 직업군으로 ‘기크(Geek)’와 ‘슈링크(Shrink)’ 개념을 도입했다.
기크는 한 마디로 전문가다. 시장을 지배하는 제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핵심 기술, 기반 기술 뿐 아니라 생산기술 등 다양한 기술과 구매·기술경영·특허·디자인·고객관리·마케팅·재무 등의 분야에서 글로벌 톱 수준의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 이 같은 전문지식을 보유하면서 이 지식을 계속 갱신해 낼 수 있는 사람을 기크라 한다.
반면 슈링크는 사전적으로는 정신과 의사라는 정의가 있는데 바로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치유하듯이 고객이 갈망하는 것이다. 아직 해결 되지 않은 것을 파악하는 창의적인 역량을 가진 사람이다. 고객의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집어내는 능력인데 이는 정신과 의사가 횡설수설하는 환자의 말 가운데서 병의 핵심적인 단초가 되는 단어만 정확히 집어내 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버드 법대 중퇴자인 빌게이츠나, 대학에서 폰트 디자인 강의만 듣다가 중퇴한 스티브 잡스는 가장 뛰어난 슈링크라 할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을 개발할 때 단 한 번도 설문조사를 해본 적이 없다. 설문 조사가 몰고 올 노이즈 자체를 배제하고 자신이 고객의 입장에서 요구를 명확하게 도출하는 탁월한 슈링크적 자질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치열한 시장에서 성공은 오로지 승자독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을 생각하면 슈링크 확보가 무엇보다 긴요하다. 기크는 교육 체제가 학문의 분화를 기반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비교적 풍부한 인력들이 교육과정을 거쳐 진입하므로 상대적으로 큰 문제가 없지만, 슈링크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교육의 수준이나 전공과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기 때문에 발굴과 육성방법이 핵심적 과제가 된다. 혁신의 산실이라는 실리콘밸리의 에코시스템을 보면 수많은 잠재적 슈링크들을 벤처 시스템이라는 생존게임을 통해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한국의 연구개발 조직은 연공서열을 벗어나 팀제를 통해 역량이 있는 사람을 책임자로 임명하는 단계까지는 발전해 왔으나, 아직도 제품 개발을 단순 기술전문가에게 맡기거나 사업 관리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슈링크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돼 있지도 못한 상태이고 따라서 혁신 제품 출현이 근원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혁신적으로 일하는 조직 구조 및 프로세스는 개방형 매트릭스 체제와 시스템 엔지니어링이 필요하다. 한국은 시장대응형 혁신을 위해 폐쇄적인 피라미드 구조를 오랫동안 유지해 왔고 더구나 정부나 대기업 조직은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해서 창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어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꽃이 필 수 없다.
이렇듯 개방형 매트릭스 체제하에 고객의 잠재된 요구를 정확히 읽어내는 슈링크적 자질이 뛰어난 ‘프로덕트 챔피언(Product Champion)’이 고도의 전문능력을 갖춘 기크와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혁신적인 신제품을 만들어내는 체제가 원활히 작동을 할 때 블루오션을 창출할 수 있다. 기업이든, 국가 연구소이든, 대학이든 제품과 서비스를 혁신하고자 하는 조직에 이러한 체제를 도입하고 신제품 개발이라는 과제 수행을 통해 슈링크로서 역량을 키워갈 때 경쟁력 있는 슈링크가 육성될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가운데 산업계를 탈바꿈하게 만든 스티브 잡스 같은 글로벌 스타 슈링크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박승용 효성중공업 연구소장 syngpark@hyo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