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대 초반, 100년 역사를 이어온 CRT(브라운관) 시대는 평판 디스플레이에 밀려 막을 내렸다. PDP와 경쟁을 거쳐 당당하게 대세가 된 주인공은 LCD. 대면적이 불가능하고 동영상 응답속도가 느리다는 초기 지적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제 LCD는 전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을 평정했다. 이런 발전사를 이룩한 것은 불과 20년만이다. 이제는 수십조원대의 시장으로 부상했으며 장비와 소재부품 등 후방산업까지 건실하게 키워냈다. 그 어떤 산업도 LCD 만큼 빠른 시간 내 성장한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성과는 괄목할 만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만한 점이 또 있다. 20년이라는 초단기간의 LCD산업 고속 성장 역사 이면에 감춰진 기술의 역사다.
초고속 성장 가도에 올라서기까지 각종 요소기술은 수면 아래에서 말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핵심이 바로 기판유리와 액정이다. LCD는 크게 빛을 내는 백라이트유닛(BLU)과 이를 화소별로 조절해주는 액정, 또 그 화소를 구동하는 박막트랜지스터(TFT)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TFT를 성형하는 기판유리와 액정은 LCD가 수면 위에 떠오르기까지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을 걸쳐 발전한 대표적인 제품들이다. 순수한 연구에서 시작했건 전혀 다른 시장을 예상했건 이들은 수십년의 시간 동안 창고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발전을 거듭해갔다.
◇코닝, LCD 기판유리 첫 샘플 공급한지 30년 만에 순익
LCD 기판유리의 대명사 미국 코닝이 LCD 유리 상용제품을 공급한 것은 기술 개발 후 무려 25년이 지나서였다. 순익이 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13년 후다. 그 사이 기술은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지만 최적의 애플리케이션을 찾을 때까지 보완을 거쳤다. 이제는 수익률이 40%가 넘는 고수익 제품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코닝이 기판유리를 상용화하기까지 어떤 인고의 시간을 거쳤는지 거슬러 올라가면 흥미롭다. 코닝이 LCD 기판유리를 만들기 위해 퓨전 공법을 개발한 것은 지난 1959년. 퓨전 공법은 원재료를 섭씨 1000도 이상 용광로에서 녹인 뒤 아래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코닝만이 갖고 있는 고품질 유리 제조 기술이다.
코닝은 당시 퓨전 공법으로 표면 연마가 필요 없는 자동차용 평면유리를 생산해냈지만 가격 문제로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1960년대 자동차 업계는 퓨전 공법을 적용한 첨단 유리보다 저렴한 비용의 제품을 선택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중단됐다. 하지만 코닝은 이 기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적합한 애플리케이션이 출현하기까지 기술을 믿고 기다렸다. 다시 평면유리를 필요로 하는 업체에 유리 샘플을 보낸 것이 1970년대. 이 시기 코닝은 퓨전 공법이 변색 선글라스 제조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시장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을 때쯤 선글라스 판매가 줄어들면서 이 사업에서 손을 뗐다. 코닝은 퓨전 공법의 최적 애플리케이션을 다시 물색하는데 집중했다.
그 결과 1985년 코닝은 일본 마쓰시다에 3인치 LCD TV용 유리기판을 첫 공급했다. 오랜 시간 인내와 통찰력, 기술 혁신으로 결실을 거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1998년 코닝은 이 사업으로 처음 순익을 거뒀다. LCD 유리기판 샘플을 공급한 지 30년 만의 일이다. 이후 코닝은 더 크고 얇고 가벼운 디스플레이를 실현할 수 있는 유리를 개발했다. 지난 2006년 중금속을 포함하지 않은 이글 XG 유리 조성을 개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스마트폰 커버 글라스로 사용되는 고릴라 글라스 또한 코닝의 ‘인내’를 잘 보여주는 예다. 코닝의 과학자들이 강화유리 연구개발 프로젝트 ‘머슬(Muscle)’을 시작한 것은 약 40년 전 일이다. 마침내 1㎠당 7톤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강화유리 ‘켐코’ 개발에 성공했다. 어떤 각도로도 굽히거나 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 개발 성과를 거두고 1962년부터 켐코를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기대했던 만큼 결실을 얻지 못했다. 코닝은 전화부스나 감옥 창문, 보안경 등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비싼 가격과 깨짐 우려 때문에 실재 양산 제품에는 적용되지 못한 것이다. 1960년대에 개발된 이 유리 제품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소재로 등장할 때까지 수십년 간 창고에 잠들어 있었다.
코닝의 고릴라 글라스가 긴 잠에서 깨어난 계기는 2005년이다. 한 모바일업체가 플라스틱 대신 유리 화면을 장착한 휴대폰을 선보이는 것을 보고 코닝은 소규모 그룹을 결성해 이전 제품인 켐코를 개량하는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프로젝트 명인 ‘고릴라 글라스(Gorilla Glass)’는 제품 이름으로도 적용됐다. 물론 이 고릴라 글라스가 켐코와 같은 제품은 아니다. 코닝은 고릴라 글라스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유리 조성을 포함한 다른 기술들을 적용해 내손상성이 뛰어난 강화유리 조성을 만들어냈다.
코닝 관계자는 “2007년 3월부터 고릴라 글라스 양산을 시작했고, 현재 이 제품은 33개 이상 주요 브랜드에서 2450개 제품 모델에 적용돼 전 세계 27억대 이상 기기에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1888년 발견된 액정, 2000년대 LCD산업 중흥 이뤄
액정은 겉보기에 액체같지만 물질 특성은 고체와 유사하다. 일반 화합물과 달리 액체상과 고체상 사이 액정상이라고 불리는 중간상이 존재하는데 전기장 변화에 반응하며 LCD의 원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디스플레이는 화소로 이뤄지는데 적녹청을 배합해 색을 만든다. 액정이 전기에 반응하는 성질을 이용해 화소별로 BLU에서 나오는 빛을 통과시키거나 가리는 방식으로 LCD는 영상을 보여준다.
LCD산업이 성장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지만 액정이 발견된 것은 1888년이다. 이후 과학계가 연구에 집중했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만 수차례. 창고 속을 다시 뒤지는 노력이 없었다면 새로운 디스플레이 시장도 열릴 수 없었다.
액정은 1888년 오스트리아 식물학자 프리드리히 라이니처와 독일 물리학자 오토 레만이 당근에서 추출한 물질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당시 학계는 이 같은 발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 같은 물질 상태가 기존의 과학지식에 부합하지 않다며 유명 과학자들까지도 공격했다. 레만이 액정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도움을 요청한 곳은 독일의 화학·제약회사인 머크였다. 머크의 도움으로 레만의 액정은 1920년대부터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응용사례가 나오지 않자 액정에 대한 관심도 시들해졌다. 머크는 당시 상황에 대해 “결국 액정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어 버렸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 말 콜레스테릭 액정과 네마틱 액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재개되면서 실용적인 액정 연구가 빛을 보게 됐으며, 1968년 미국 전기공학자인 조지 하일마이어가 최초의 LCD를 선보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LCD가 상용화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적합한 소재가 부족해 제품은 섭씨 80도 이상에서만 작동했기 때문이다. 1976년 영국의 조지 윌리엄 그레이의 시아노비페닐 발견을 계기로 머크 연구진은 반응시간이 빠르고 광학적 성질이 우수한 액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액정 사업화에 가속도가 붙은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LCD는 낮은 소모전력, 경량화, 방전이 없는 장점으로 인해 디스플레이로서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머크도 고객이 생겨나면서 연구팀을 확대하고 대학·연구소와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업화가 진행되면서 액정 제조사와 디스플레이 제조사가 뚜렷하게 나눠지기도 했다. 디스플레이업체들은 주로 아시아 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머크는 1980년 일본 아쓰기에 액정 혼합물 응용 연구소를 열었다. 1989년에는 서울에 액정 혼합물 응용 연구소를 세웠다.
액정이 머크의 주력 사업으로 부상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1994년 머크는 매출 1억마르크를 돌파했다. 1997년 노크북과 휴대폰 확산으로 액정 매출이 65%나 급증했다. 머크는 액정을 상용화한 지 100주년을 맞이한 2004년 관련 특허 또한 2500여건 확보했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60%가 넘었다.
머크 관계자는 “지금의 성공이 있기까지 여정은 길고도 험난했지만 결국 성공을 이뤘다”며 “이는 인내와 과감한 사업적 결단, 성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고객과의 긴밀하고 신뢰성 있는 협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