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는 이번 정부의 핵심 기치다. 내년도 창조경제 관련 예산만 8조3000억원이다. 올해보다 17.1% 늘어난 액수다. 내년도 전체 예산 증가율은 5.7%. 정부가 창조경제에 얼마나 올인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난 2013년 2월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줄기차게 몰아붙인 창조경제 드라이브는 집권 2년차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별다른 성과나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출범 직후부터 관련 지원 정책은 많이 나오고 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도는 떨어진다. 특히 중소기업인들의 실망이 크다.
실제로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 5000명을 대상으로 창조경제 체감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4%가 ‘창조경제 정책이 기존 산업 정책과 다르지 않다’고 답했다.
이에 전자신문은 창간 32주년을 맞아 창조와 혁신의 글로벌 아이콘인 이스라엘·영국·스웨덴의 각국 주한대사를 초청,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렉싱턴호텔에서 긴급 좌담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 3국 대사는 창조경제 시대에 맞게 한국 정부의 역할도 전면 재조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규제완화도 중요하지만 스타트업과 중소·벤처기업의 육성을 위해 ‘착한 규제’는 지속 강화돼야 하며,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관련 제도의 마련에 앞서 문화적으로 정착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리 구트만 주한 이스라엘 대사
△스콧 와이트먼 주한 영국 대사
△라르스 다니엘손 주한 스웨덴 대사
-사회: 정국환 한국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선임연구위원
정부의 역할
◇사회=창조경제 시대를 맞아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특히 세계적으로 창조와 혁신에 관해 높은 역량을 자랑하는 귀국의 사례에서 우리 사회가 배울 점이 많을 듯하다.
◇라르스 다니엘손 주한 스웨덴 대사(이하 스웨덴)=더 이상의 고용창출과 산업발전 기여를 기대하기 힘든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은 이제 한국에선 용도 폐기될 때가 됐다. (중소기업도) 대기업에 납품하며 기생하는 것에 만족하는 방식을 버려야 한다. 중소기업 그 자체로 세계시장에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데 정부의 역할을 맞춰야 한다. ‘스웨덴’ 하면 볼보나 이케아 등을 떠올리는데 이런 대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실제로 스웨덴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것은 중소기업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의 정책도 이들 중소·벤처기업을 살리고 도와주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스콧 와이트먼 주한 영국 대사(이하 영국)=규제 철폐가 선진화의 표본인 듯 보이지만 선진국일수록 한국 못지않은 강력한 규제가 여전히 많다. 기계적 규제 철폐에 함몰되기보다는 중소기업 보호를 위한 대기업 참여 제한 등 선한 규제(better regulation)를 더욱 강력히 시행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구트만 주한 이스라엘 대사(이하 이스라엘)=정부와 기업, 대학이 협력해서 결과물을 창출해 내야 한다. 연구개발의 성과물도 이들의 협업 속에서 생성된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굳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 3자가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보며 시너지를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정부는 완벽하게 투명해야 한다.
창조경제 활성화
◇사회=창조경제에 대한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요즘이다. 이에 관해 한국보다 선험적 산물이 많을 것으로 본다. 창조경제의 성공 포인트는 무엇인가.
◇영국=창조경제는 영국 경제성장의 핵심 자양이다. 007스카이폴의 흥행 수입은 7억 파운드(약 1조2000억원)에 달하고, 영국 드라마의 한 해 수출액도 14억8000만파운드 규모다. 한국도 이미 창조경제의 기본은 갖추고 있다고 본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중국에서 엄청나게 히트를 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 경제적 성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노력과 함께 사회적·문화적 성숙이 뒷받침돼야 한다. 여기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스웨덴=창조경제는 중앙정부보다는 지자체의 관심과 지원이 훨씬 효율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한국 정부가 ‘창조경제센터’라는 것을 만들어 전국 시도 지방정부와 공조해 나가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들이 중심이 돼 지역 대학과의 R&D 연계, 이를 바탕으로 한 지역 벤처 육성 등 선순환의 고리가 마련돼야 한다.
◇영국=창조경제도 결국 생태계다. 즉,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영국 스코틀랜드의 작은 동네인 에든버러는 게임이 강한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이곳에서 세계적인 히트작 ‘그랜드 데프트 오토’ 게임을 만든 록스타는 발매 첫 주에 수십억달러어치를 팔았다. 이는 창조경제의 좋은 예다.
◇이스라엘=창조경제란 말 그대로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당연히 실패하고 때로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한국은 이런 실패에 매우 인색하다. 패자가 부활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창조경제에 도전하겠는가. 유대인들은 일명 ‘후츠파’로 불리는 뻔뻔하고 당돌한 면이 있다. 후츠파의 7대 정신 중 하나가 바로 ‘실패에서의 배움’이다.
◇스웨덴=패자 부활 문화를 사회 곳곳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말 그대로 문화다. 한 문화가 뿌리내리는 데는 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만 여기서 그 절대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의 창조경제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다. 스웨덴만 해도 실패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여성이 훨씬 더 의연하고, 재도전 성공률도 높다. 남성 중심의 한국 사회 역시 이 같은 다양성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복지 시스템이다. 쫄딱 망하고 돌아와도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하면서 재기를 노릴 수 있는 사회적 안전판이 마련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도전도 있고 거기에 성공도 따른다.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정부는 ‘실패를 두려워 말라’는 말만 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영국=아인슈타인도 얘기했다. 실패도 계속하다 보면 호전되게 마련이라고(fail again, fail better).
혁신의 조건
◇사회=창조경제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 ‘혁신’이다. 기업가정신과 스타트업 등 창조경제의 자양이 되는 모든 사안이 결국 혁신에서 출발한다. 혁신을 바라보는 각국의 시각은 어떤가.
◇스웨덴=혁신은 사고의 전환에서 나온다. 예컨대 경직된 문화나 조직에선 창조적인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한국 특유의 조직문화는 경계의 대상이다. 한 사람의 지시와 명령으로 나머지 모든 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구조는 생산 효율성 면에서는 더없이 좋다. 하지만 이는 과거 경제 개발기 또는 산업 중흥기에서나 필요했던 시스템이다. 한국만 해도 이제 지식정보화 시대에 돌입한 국가다. 개개인의 의식전환(mind set)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양성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영국=영국 자동차 산업은 한때 사양길에 접어들었으나,요즘은 잘나간다. 지난해에만 1500만대를 생산, 이 가운데 80%를 한국 등 해외로 수출했다. 국제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 원(F1) 차량 중 절반 이상이 영국에서 제작된다. 이는 혁신의 산물이다. 그 옛날 롤스로이스 시절만 붙잡고 있었다면 지금의 영국 차는 없다. 혁신의 끝은 없다. 내연기관을 만들어 산업혁명을 이룬 우리지만 지금은 전기차로 눈을 돌리고 있다. 혁신을 위해서라면 끊임없이 각성하고 도전해야 한다.
◇이스라엘=혁신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공을 들이는 만큼이나 시간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당장의 성과가 없다고 치워버려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다행인 것은 한국 사회가 긍정적 방향으로 변모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 부모 세대와 달리 한국의 젊은 세대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첨단 기술에 개방적 성향이 강한 이들 세대가 결국 한국 사회의 혁신과 개혁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정보화의 역량
◇사회=대한민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자정부 1등 국가다. 정보화 시대를 맞아 ‘정부 3.0’ 등 디지털 사회로의 변모에 국가적 역량이 집중되고 있다. 빅데이터 시대의 바람직한 전략은 무엇인가.
◇영국=세계 1등의 한국만은 못하나 우리도 UN 평가에서는 8위 국가다. 세금환급 시스템 등 주요 전자정부 수단을 갖추고 있다. 각종 사회적 비용을 절약한다는 점에서 전자정부의 효용성이 크다. 중소기업 전용 과세 시스템 구축으로 영국에서만 매년 최고 2억5000만파운드의 비용이 절약되고 있다.
◇스웨덴=전자정부는 기본적으로 ‘비대면’이다. 이는 상호 간 신뢰를 기반으로 해야 발전이 가능하다. 국민과 정부 간 불신의 벽이 높다면 전자정부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신뢰가 곧 ‘사회적 자본’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스라엘=디지털 만능주의는 자칫 ‘정보보호’를 소홀히 여기는 촉매가 될 수도 있어 이를 경계해야 한다.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사이버 시큐리티를 보완해야 안전한 정보사회를 만들 수 있다.
◇영국=하지만 지나친 규제나 제한은 자칫 ‘인터넷 자유’를 해치는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상호 간 접점을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개인정보 문제로 적잖은 비난이 있지만 ‘빅데이터’는 중소·벤처기업에 절호의 기회다. 특히 창조경제 확산을 위해서는 빅데이터 활용이 필수다. 그런데 보안 문제에 지나치게 함몰되면 이런 기회를 놓칠 우려가 있다.
◇사회=이스라엘 대사도 이 자리에 계시지만, 세 나라 모두 교육에 관해서 전 세계의 모델이 되곤 한다. 여기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한국 교육의 모습은 본국과 어떤 차이가 있나.
◇이스라엘=영어 단어 가운데 ‘클레버’(clever)와 ‘스마트’(smart)가 있다. 비슷한 뜻이나 뉘앙스는 확연히 다르다. 쉬운 일만 찾아 하고 영악하며 약삭빠름을 뜻하는 클레버보다는, 어떤 어려움도 정면 돌파하는 스마트형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교육의 핵심이다. 이스라엘 학생들은 오후 1시 이후면 자유다. 교과서에 파묻혀 있는 시간은 그때까지다. 자유롭게 상상하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700만여명밖에 안 되는 인구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다수 배출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스웨덴=한국은 학벌·스펙 위주의 교육이 주가 되는 듯하다. 스웨덴도 비슷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목수의 돈벌이가 의사나 판검사에 못지않다. 그래서 자기 딸이 목수에게 시집 간다면 좋아하는 분위기다. 자신의 위치에서 프로의 자세로 최선을 다하면 우대받는 사회 문화가 먼저 정착돼야 한다. 교육 혁신 역시 시작은 의식과 문화의 변화다.
◇영국=철저히 실무형 직업 교육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 자동차 정비하는 데 학사학위는 필요없다. 지나친 학벌주의는 사회적 비용만 가중시킬 뿐이다.
상호협력
◇사회=한국과의 상호 협력 증진과 교류 확대를 위해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하나.
◇스웨덴=오늘(18일) 한국 정부가 수입쌀 관세율을 513%로 정했다. 이건 난센스다. 그만큼 한국의 개방성이 떨어진다는 증거다. 물론 농업 등 개방으로 피해를 보는 산업 분야에는 그에 걸맞은 보상책을 마련해 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고관세율을 그대로 유지하며 개방 자체를 원천 차단하거나 대안 없이 반대하는 것은 국제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우리는 현재 미국, 그 가운데 하버드대와 MIT 등이 있는 매사추세츠주와 가장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3년간 이스라엘 업체들이 매사추세츠주 수익의 12.6%를 증대시켜 줬다. 일자리 창출률도 연 5.3% 높아졌다. 뉴욕시와는 맨해튼 인근 루스벨트섬에 ‘스타트업 캠퍼스’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한국과도 이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하고 싶다.
◇영국=양국 간 상호투자가 더욱 활성화되기 바란다. 특히 금융과 콘텐츠는 영국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런던 금융가의 세련된 금융 기법과 노하우를 도입하면 낙후된 한국 금융산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창조경제의 뿌리산업인 음악, 영상 등 콘텐츠 역시 한국의 하드웨어와 접목되면 엄청난 시너지를 이뤄낼 수 있다.
◇사회=오늘 좌담회를 주재하면서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영어를 배우고 쓰는 데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 모국어가 아닌 대사들의 영어 공부 비법은 뭔가.
◇스웨덴=스웨덴 국민은 대부분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한다. 하지만 한국 학생들을 보면 문법 실력만큼은 우리보다 나은 것 같다. 그런데 입을 떼지 않는다.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려 머릿속에서 주어, 동사, 목적어를 나열하고 있다. 그래서는 늘지 않는다. 틀려도 좋다, 완벽은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하고 그냥 말하라. 그래도 대부분 알아 듣는다.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