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의 미디어 공명 읽기]<38>오려두기와 붙이기

오려두기와 붙이기(cut&paste). 컴퓨터 문서 편집의 대표적인 관습인 오려두기와 붙이기는 원래 종이 문서를 다루는 편집 관습이었다. 말 그대로 가위를 가지고 한 페이지의 특정 문단을 자른 후 이를 다른 페이지에 옮겨 붙이는 것을 말한다. 가위와 풀은 이런 편집의 대명사인 도구들이다.

보편적 명령어들이 키보드에 배치된 제록스의 스타 컴퓨터.
보편적 명령어들이 키보드에 배치된 제록스의 스타 컴퓨터.

언론사가에 따르면 19세기 미국에서는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오려 붙여 별도로 모아두는 관습이 유행했다. 이른바 ‘스크랩북’ 문화다. 심지어 풀 없이 오린 기사를 끼워 넣을 수 있는 ‘마크 트웨인 특허 스크랩북’(1877년)은 광고까지 하며 인기리에 판매되기도 했다. 가격은 우송표를 포함해 1.25~3.5달러였다.

스크랩 기술은 크게 발전해서 색인(index)을 달아 시리즈 책을 엮어내기도 했다. 이런 문화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다른 나라에도 보편화돼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스크랩북을 만드는 사람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신문사에서는 지금은 없어진 조사부 기자들이 매일 기사들을 유형별로 분류해 스크랩북 형식으로 저장해 나중에 참고할 수 있게 해두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던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은 아내가 개인적으로 만들어준 스크랩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려두기와 붙이기는 단순히 지면 편집에 그치지 않고 지식의 저장고 역할을 했던 것이다.

디지털 문화 이론가인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는 이렇듯 다른 사람들의 글을 자신의 것으로 전유한다는 점에서 이런 사람을 수렵채취자에 빗대어 ‘텍스트 포획자(textual poacher)’라고 부른 바 있다.

이런 오려두기와 붙이기 관습은 컴퓨터 기술을 만나 명령어로 거듭났다. 역사상 최초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든 제록스 팔로알토연구소 학습연구실의 래리 테슬러(Larry Tesler)는 1974~1975년 텍스트 편집기에 이런 관습을 명령어로 구현했고, 1981년 출시된 스타(Star) 컴퓨터의 키보드에 이런 명령어들은 위한 전용키를 배치했다. 지금은 삭제키만 남아 있지만, 스타의 전용키 명령어로는 삭제, 복사, 이동, 반복, 되돌리기, 도움말 등이 있었다.

제록스 연구팀은 이것들을 ‘보편적 명령어(universal commands)’라 불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는 전형적인 텍스트 문서 이외에 이미지, 동영상, 소리 등 모든 유형의 콘텐트를 대상으로 이런 명령어를 가지고 오려붙이거나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오려두기와 붙이기 대상이 디지털 시대를 맞아 종이에서 멀티미디어로 확대된 것이다. 디지털 컨버전스는 산업 수준의 융합 이전에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이라는 미시적 수준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이제 가위와 풀은 컴퓨터 알고리즘이 대신한다. 컴퓨터는 편집하는 이용자에게 가위와 풀질을 하는 것 같은 착각(illusion)을 제공하지만, 심층적으로는 고도의 연산이 진행된다. 편집할 콘텐츠의 유형에 따라 각기 다른 알고리즘이 적용되는데, 1차원 시퀀스를 조작하는 문자열 텍스트와 달리 비트맵 이미지는 2차원의 픽셀을 다루기 때문이다. 즉 가위와 풀을 활용하는 오려두기와 붙이기 관습과 달리 컴퓨터 관습에서는 이용자에게 보이는 표면과 컴퓨터가 연산을 하는 심층 사이에 차이가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에서도 흔히 오려두기와 붙이기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끌어 모으고 또 새롭게 재구성한다. 이 두 가지 관습이 없었다면 우리의 컴퓨터 조작은 엄청난 인지적, 육체적 부하를 수반했을 것이다. 단적으로 SNS 포스팅은 말할 것도 없고, SMS나 메신저의 그렇게 긴 링크 주소를 어떻게 타이핑해 붙일 것인가?

이재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