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벤처 생태계 지원에 소매를 걷었다. SK, 삼성, LG 등 정보통신기술(ICT) 대기업이 앞장섰다. 삼성과 SK는 각각 대구와 대전에 창조경제혁신센터를 가동했다. LG도 곧 가세한다. 돈도 쏟아 붓는다. SK는 450억원, 삼성은 100억원 규모 펀드를 조성한다.
가뭄에 시달린 벤처 생태계에 쏟아진 한줄기 소나기다. 더욱이 우리 대기업보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 중국 ICT기업이 한국 벤처 발굴에 더 적극적인 마당이다. 우리 대기업이 비로소 제 역할을 찾기 시작했다는 신호이니 더욱 반갑다.
물론 창조경제 성과가 절실한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은 ‘억지춘향’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다.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역과 대기업을 짝지어 창조경제 생태계를 만들자는 정부 구상에서 출발했다.
순리로 시작한 일은 아닐지라도 대기업은 그 취지에 공감했다. 기꺼이 동참했다. 정부 기대 수준도 뛰어넘었다. SK는 아예 창조경제혁신추진단과 관계사 협의체를 그룹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에 두고 SK텔레콤 대표를 수장으로 임명했다. 벤처 생태계 지원에 그룹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의지다. 이런 능동적 참여가 일부라도 있다면 이 사업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
이왕 벌인 일 제대로 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멈칫 한다. 대기업이 과연 벤처 생태계를 제대로 품을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회의적이다. 대기업 의사결정 과정과 벤처 생태계 인식이 확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돈과 인력을 써도 별 성과를 낼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기술 벤처기업들은 숱하게 대기업 문을 두드렸다. 전부는 아니나 상당수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기업도 문턱을 넘는 것은 극소수다.
대기업은 사람보다 조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파편화한 세부 조직 간 의사소통이 없다. 알게 모르게 알력마저 있다. 이해관계가 서로 어긋난 경우다. 어느 사업부가 무시한 벤처 혁신기술과 아이디어가 다른 사업부는 몇 달 째 찾아 헤맨 것일 수 있다. 어느 사업부가 찾아낸 벤처 혁신기술과 아이디어가 다른 사업부에 자칫 재앙이 될 수 있다. 대기업이 벤처생태계를 품으려면 내부 의사소통과 이해관계 조정 구조부터 혁신해야 한다.
벤처기업이 가까스로 대기업 문턱을 넘어도 이후 과정은 더 험난하다. 실무자부터 최고경영자까지 꼭 필요한 벤처기업과 기술이라고 인정하고도 적절한 대가 지불에 인색하다. 기업이든 기술이든 제값을 주고 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더 싸게 살까, 아예 공짜로 먹는 방법은 없을까를 더 고민한다.
그러니 구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미국 기술 대기업이 갓 창업한 스타트업 기업 인수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는 것을 우리 대기업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더 싸게 사거나 새로 개발하려다 기회를 놓치느니 당장 필요할 때 돈을 쓰는 게 더 낫다는 판단 자체가 없다. 국내외 창업 기업이 한국보다 미국, 심지어 중국 기술대기업 문 앞에 줄을 선다. 그 이유를 국내 대기업은 결코 알지 못한다.
대기업이 벤처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이니 고맙다. 대기업 스스로 벤처 생태계를 받아들일 내부 혁신까지 간다면 정말 고맙겠다. 이런 혁신 없이 외부 지원만 늘리면 되레 역효과를 볼 수 있다. 벤처기업 ‘희망고문’ 강도가 세진채 더 오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